2014. 3. 9. 03:49

이 세계의 신은 몇 가지의 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인간의 몸에 나타나는 표식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자비로운 신께서는 그의 마음을 살피사 그가 숭배하는 대상을 그의 육체에 새겨주곤 하였다. 

어느 정도라는 것은 그 인물이 죽음이 찾아와야 끊어낼 수 있는 정도였기에, 때로는 신앙이었고 때로는 중독된 대상이었으며 보통은 깊이, 아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다른 이의 이름이 새겨지면, 큰 사건이 아니라면 부모들은 자식을 그 이름의 상대와 맺어주려 애를 썼다. 그것은 반대해봤자, 일단 특정인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은 자신이 죽기 전까지 다른 사람을 전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보통 자신이 사랑하는 만큼 자신에게 사랑을 되돌려 주는 신뢰 관계 위에서 깊이 안심하고 사랑해야만 이름을 발현했다. 그래서 보통 이름이 떠오른 이들은 그 관계가 비극으로 가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찰스와 에릭의 집안은 양가가 대대로 신앙 깊은 집안이었다. 당연히 두 집안의 교류로 활발하였다. 찰스는 에릭과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다. 두 아이가 네살이 될 무렵부터 찰스와 에릭의 집안 사이에는 먹구름이 꼈다. 에릭의 아버지는 기존 교단의 해석에 대대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신학교수였다. 찰스의 가문은 대대로 전통적인 신앙을 지켜오는 정통파 장로 집안이었다. 가까웠던 두 가장은 각자가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높은 자리에 갈 수록 서로에게 날을 세웠고, 그들의 부인도 서로를 눈엣가시로 여기며 여기저기에 상대방의 치부를 흘리고 다녔다. 겨우 여섯 살이었음에도 찰스는 집안의 변화를 눈치챘다. 하지만 에릭과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찰스는 어머니 몰래 에릭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에릭. 네가 보고 싶어. 에릭 또한 찰스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도 마찬가지야. 1년 후 편지를 발견한 아버지는 화를 내며 찰스를 먼 지방으로 보내버렸다. 찰스는 슬펐지만, 아이였기에 방법이 없었다.

에릭의 얼굴이 희미해 졌지만,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에릭의 존재는 찰스에게 더 깊어졌다. 찰스는 에릭처럼 예쁜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에릭처럼 고어를 잘 읽는 어린이도 본 적이 없었다. 에릭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에릭같은 존재는 없었다. 에릭과의 세세한 추억을 잊어갈수록 에릭과 마음 찡할 정도로 강한 교감은 더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어째서인지 이유를 알 수 없던 찰스는, 12살 때 우연히 참가한 마을에 결혼식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신랑과 신부는 간만에 서로의 이름이 나타난 커플이었다. 신랑은 신부의 이름이 무려 목덜미에 새겨졌으며, 신부는 손가락에 새겨졌다. 신랑은 신부의 손가락에 새겨지 자신의 이름에 입을 맞추고, 신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신랑의 목부분에 얼굴을 묻고 자신의 가문의 이름에 키스했다. 찰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둘의 모습에 자신과 에릭을 대비했다. 에릭. 얼굴은 잊었으나 내 가장 귀한 보물이여. 그때였다. 찰스는 자신의 왼쪽 허벅지가 갑자기 인두로 지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찰스는 그 후로 2주일을 앓았다. 각인 의식의 시작이었다. 찰스의 부모는 내심 찰스가 대체 어떤 이름을 달고 나타날지 기대했다. 아버지는 서둘러 시골로 내려왔을 정도였다. 어느 어여쁜 처자려나. 그러나 심한 통증으로 눈을 뜨지 못한 찰스보다 먼저 찰스의 상흔을 확인한 아버지는 충격으로 그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버지는 온 몸에 열이 오른 찰스를 매질로 깨우고 다시 매질로 기절하게 만들었다. 찰스는 이유도 모르고 맞다가 간신히 어머니에 의해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을 수 있었다. 충격으로 떨고 있던 찰스는 자신의 허벅지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놀랐다. 친구의 이름이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는 울면서 찰스에게 말했다. 찰스. 남자가 좋으니? 찰스는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찰스, 에릭이 좋아? 하지만 에릭의 집안은 반역자가 되었어. 그러니까 에릭을 만나면 안돼. 찰스는 왜 에릭네 집이 반역을 했어요? 라고 물었다. 에릭의 아버지가 기존 교리를 뒤집어 엎고 교회의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종파를 만들어 버렸어. 정말이지 미친 집안이야. 에릭네 집안은 악마가 된거야. 그러니 엄마랑 약속하렴. 에릭을 만나지 않는거야.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네 집안이 만든 새 종파는 기세를 무섭게 확장해 나갔다. 찰스는 시골에서 차분히 기존 교리를 공부하고 있었다. 사실 찰스가 보기에도 현재의 세계관은 기존 신의 말씀에 인위적으로 각색한 부분이 많았다. 현대에 전혀 적용할수 없는 말도 안되는 악습도 있었다. 몇몇 구절은 애초에 몇천년이 지나면서 단어의 뜻이 오용된 흔적도 보였다. 오히려 에릭의 종파가 주장하는 구절중엔 일부는 해석의 오류로 볼 수 있는 구절이 있었으나 치명적이지 않았고, 현재의 신앙보다 좀더 건설적인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종교란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다. 아버지의 자랑이자 삶의 모든 것이었던 종교적 신념을 정면에서 반박할 정도로 찰스의 신앙은 깊지 않았다. 하지만 가문의 세계관을 이어받으면서도 찰스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구세력과 신세력의 차이를,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의논하였다면 양쪽 모두에게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종교가 절대인 기성세대들에게 랜셔 가가 포함된 신세력과 자비에 가가 주도하는 구세력은 서로의 존재를 용납치 아니했다.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절대권세를 휘두르며 각종 악습이 가득하였던 구세력을 참지 못하고, 신세력은 결국 가뭄이 심하던 해 말도 안되는 종교세를 거두는 구세력의 예배당을 향해 폭동을 일으켰다. 찰스와 에릭이 함께 다녔던 교회까지 습격받은 날 저항하던 찰스의 아버지는 그들의 엄청난 피습에 돌아가셨다. 찰스는 그날 당주가 되어 긴급히 중앙회의 소집에 응했다. 교주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의 권위를 보입시다. 그 후 수많은 사람이 죽이고 죽었다.

 

찰스는 신세력에 저항하면서도 그들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자제하였다. 그것을 눈치챈 신세력도 찰스가 맡은 부분에서는 차츰 과격한 행동을 피하게 되었다. 처음엔 공격적이기만 했던 신세력도 지속전에 지쳤는지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고는 더 이상 기존 신자들을 회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신론자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덕분에 구세력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종전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각 편의 제법 높은 신관들이 몇 번 형식적인 밀서를 보내고, 몰래 으슥한 곳에 모여 밀약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들었다. 휴전이 찾아왔다. 

찰스는 전쟁을 하면서도 그것이 끝난 후에도 에릭 렌셔를 미친듯이 찾았지만, 찰스의 아버지를 살해한 죄목으로 렌셔 가의 모든 가족이 구세력에게 몰살당했다는 정보를 듣고 오열했다. 그가 죽어도 자신이 죽지 않은 이상 허벅지의 낙인은 풀리지 않는다. 찰스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낄 수 없었고 무엇에도 현실감과 충만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인생을 떠받쳐야 했을 가장 큰 기둥이 없었기에, 찰스는 공허함을 잊으려 하룻밤의 사랑들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사실 구세력의 타락은 몇 백년 전부터 진행됬기에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매춘과 불륜도 성행하였다. 찰스는 주변 신자들의 행동을 많이 봐왔기에 딱히 죄의식 없이 여러 사람과 관계를 가졌다. 사실 찰스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다. 찰스의 허벅지에 각인한 대상의 이름이 적혀있는 이상 그 누구도 찰스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질 리 만무했다. 

전쟁의 공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오르게 된 찰스의 유일한 취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세계는 신이 직접적인 능력을 보이기 때문에 신앙심이 없는 자가 드물었다. 아이들이 커서 자신의 아버지나 에릭의 아버지 같은 경직되고 배타적인 신앙관을 갖게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찰스와 에릭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찰스는 고아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최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올수 있도록 의견을 가르쳤다. 찰스는 박학다식한데다 그의 집안이 워낙 저명하였기에 각지에서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를 찰스에게 보냈다. 학교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공적인 일이 잘 풀려도 찰스의 마음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찰스는 평소와 같이 기도를 마치고, 뒷 골목의 음란한 구역으로 걸어갔다. 평신도들의 눈을 피해 고위 신앙인들이 모이는 비밀 가게인데, 이곳의 존재 자체가 구세대의 양면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찰스는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평소에 고고한 척 신을 믿는 척 순결한 척 내숭을 떨던 이들이 정욕에 눈이 멀어 시뻘개진 눈과 혈색이 오른 뺨을 숨기지 못하고 서로를 욕정어린 눈으로 탐색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가게안의 공기조차 거북했다. 이젠 이곳도 질리나보다. 찰스는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자신의 옆에 누군가 앉았기에 생각 없이 옆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각인을 한 이후 처음으로, 찰스의 심장이 움직였다.

그 남자의 외모는 정말로, 고아했다. 그의 얼굴또한 금욕적이고 단정하였지만, 그가 두르고 있는 수도사같은 분위기 또한 그를 특별하게 보이게 했다. 정말로 신을 믿는 사람이란 이런 느낌일지 모르겠다. 찰스는 신앙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그 신비한 남자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아니 호기심보다 경외심이 일었다. 하지만 이 가게의 목적은 분명하다. 찰스는 자신쪽에서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신도 찾지 않는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되셨습니까." 
"신이 만든 곳이기에 왔습니다." 
"이곳은 오랜 구습과 인간의 자기변명이 만들어 낸 곳입니다." 
찰스는 신세력이 구세력을 비판할 때 쓰는 문구를 인용했다. - 고인물 처럼 썩은 구습과 잠시의 타락은 인간으로서 당연하다는 자기합리화의 결정체들 같으니! 
"불완벽하게 창조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거두시는 신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그 남자는 나즉하게 웃으며 구세력이 신세력을 비판할 때 쓰는 문구를 인용했다. - 신이 인간을 만드실 때 실수로 땅에 떨구에 지혜의 눈과 선의 날개와 영겁의 수명이 사라졌더라. 그러나 신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삶을 허용하사 그 삶에 깊이 오시메 첫 인간이 구세대의 교주라. 그에게 영광을 바치나이다.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구세대의 인간밖에 오지 않았기에 위험하였지만 찰스는 신경쓰지 않고 신세대의 논리 중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부분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 하였다. 그는 구세대의 당위성과 첫 신과 접촉했던 교주의 가르침을 보존하려 최대한 노력하는 태도를 옹호하였다. 밤을 세우고 찰스는 그 남자와 만족스럽게 자리를 떴다. 비록 섹스를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마음이 충만한 느낌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막스 아이젠하르트였다. 

찰스는 그 남자와 계속 성적인 뉘앙스 없이 토론만으로 밤을 보냈다. 찰스는 정말로 몇 년만에 완벽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전쟁에 그만 모든 가족을 잃고만 그의 가족사에 슬퍼했으며, 고통속에 방황하다 신앙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한 그의 확신에 감동하였고, 찰스 당신같이 건강한 동지를 만나 기쁘다는 말에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기뻐했다. 자신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드디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찰스의 몸은 육욕의 기쁨을 알고 있었다. 찰스는 어차피 첫 만남을 그러한 곳에서 했기에 조심스레 막스를 유혹하였다. 


Posted by Karin(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