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9. 03:43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은 변명이다. 그것은 그냥 성격이 나쁠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로키는 정말로 힘들었다. 16세의 레이더는 너무나 예민해서 소유주인 로키 조차 괴롭히고, OUTCOME 또한 어찌나 밉살스러운지 원할 때도 원하지 않을 때도 주변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돌아버리게 할 수 있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된 로키에게 타인과 맺는 관계란 아주 얇은 유리장식처럼 아슬아슬했다. 로키는 어머니의 무한한 인내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 위태로웠던 로키의 세계는 단 한 사람을 만남으로서 극적으로 안정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올릴 수 있다. 처음 만날 날, 수줍게 인사하는 그의 얼굴에 수시로 불평불만을 내뱉던 로키의 입술은 감히 그 사람에게 마저 불친절할 수는 없었다. 연한 황금빛의 헤어스타일은 촌스러웠지만 그 남자가 미소짓는 순간은 너무나 완벽해서 시야가 흐릿할 정도였다.로키는 직감했다. 이미 로키의 감정은 로키의 것이 아니었다.


스티브는 토르의 집에 자주 놀러가는 편이었다. 원래 토르와는 클래스 메이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토르의 동생인 로키와도 사이가 좋아서 인지 어느새 토르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로키는 좋은 아이였다. 머리가 좋고,  남자인데도 선이 가녀리고 제법 예쁘장한데다, 언제나 예의바르고 기품이 있어 스티브도 굉장히 아끼는 동생이었다. 로키는 감수성도 예민해서 타인의 기분에 민감한데다 표현력이 풍부한 편이라, 스티브는 로키와 대화하는 것이 토르와 말하는 것보다도 즐거웠다.  로키 또한 스티브를 잘 따르는 편이라, 스티브가 놀러올 때마다 뭔가 필요한게 없냐며 쪼르르 달려와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다. 동생이 없었기에 스티브는 로키가 귀여우면서도 무척이나 기특했다. 

로키는 스티브가 오기 전에 자신의 방 뿐 아니라 형인 토르의 방까지 깨끗하게 정리해놓았다. 스티브가 오면 토르와 둘이서 놀고 있다가, 화제가 떨어질 때 쯤 기가막힌 타이밍에 이렇게 들어오곤 했다. 스티브가 좋아하는 원서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스티브가 로키에게 빌린 책만 이미 여섯 권이 넘었고, 음반 CD는 수를 세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심지어 로키는 자신이 선물받았던 물건 중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며 스티브에게 포장만 뜯었을 뿐인 아주 상태 좋은 옷이나 운동화 같은 것도 자주 줬다. 괜찮다고 손사례 쳤지만 스티브가 봐도 로키가 받은 물건은 로키의 취향이라 볼 수 없는 물건이라 스티브는 곧 고마운 마음으로 로키의 애용품들을 받았다. 역시 집이 잘 살기 때문에 선물도 많이 들어오는 듯 한데, 이왕이면 사용할 사람의 취향을 잘 알아보고 사주는게 좋지 않을까. 로키가 남자애라서 그런지 로키가 받는 물건중엔 로키의 체구나 취향보다는 스티브나 토르에게 맞춰진 것이 많았다. 스티브는 어부지리와 함께 역시 선물을 줄 때는 잘 알아보고 줘야 하는구나라는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

또한 스티브는 로키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의 교정도 부탁하고는 했다. 이건 사실 토르에겐 비밀이었는데, 로키는 소설을, 스티브는 그림을 이메일로 교환하며 서로 감상이나 장단점 등을 교환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소설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저 로키의 소설에 감탄 밖에 하지 못했지만 로키는 매우 자세한 감상이나 아쉬웠던 점을 조목조목 정리해서 메일을 보내주곤 했다. 취미생활이라고는 하지만 로키의 조언 덕분에 스티브의 그림은 크게 발전했다.  아마도 스티브의 뮤즈는 로키 같았다. 사실 얼굴도 예뻐서 모델을 부탁한 적도 있었는데 무려 다섯시간이 넘는 강행군 동안 로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집중했다. 누드크로키 모델도 서주겠다고 했는데 방학이 끝나 어영부영 약속이 미뤄졌지만, 어쨌건 로키는 스티브에게 정말 고마운 동생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스티브는 로키에게 연애 상담을 한 적도 있었다. 여자친구와 다툼이 잦아졌는데, 로키는 스티브의 한탄을 끝까지 듣더니 한숨을 쉬면서 매우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언해주었다. 스티브는 자신이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로키가 연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스티브는 로키의 조언을 충실히 지키며 여자친구를 체크했다. 그리고 로키가 말했던 형편없는 여자에 자신의 여자친구가 해당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브는 로키 덕분에 여자친구와 뒤끝없이 헤어질 수 있었다.


 

오늘도 당연히 스티브는 토르에게 붙잡혀 토르의 집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너무 토르를 자주 보는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토르는 좋은 녀석이고, 스티브가 친 동생 수준으로 이뻐하는 로키까지 있으니 놀러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토르의 방에 들어서 한참 뒹글거리며 만화책을 보고 있을 때 작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토르가 벌컥 문을 열자, 형에 비해 체구가 자그마한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스티브와 눈이 마주치자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로키는 형에게 들어와도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쟁반에 무언가 바친 채로 조심스레 들어왔다. 스티브는 그 쟁반을 보는 순간 토르의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오늘도 주께서 스티브에게 시련을 주셨다.

"오늘도 요리해준거야? 고마워. 정말로 신경쓸 것 없는데."

"스티브, 그렇게 사양 할 필요 없어. 내 동생의 요리실력은 세계 최강이라고."
스티브는 우울하게 웃으며 보기에는 멀쩡한 로키의 쿠키를 입에 넣었다. 아. 역시. 스티브는 신음했다. 
이건 쿠키와 같은 재료로 만들었으나 결과는 절대 쿠키가 아닌 그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로키는 자신은 그것을 입에 대지 않은 채 수줍게 볼을 붉히며 더 드세요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하며 접시를 밀어주고 있었고 토르는 정말 맛있다는 듯이 로키의 쿠키를 주먹째 퍼먹고 있었다. 왜 신은 스티브에게 거절할 용기를, 로키에게 음식솜씨를, 토르에게 미뢰를 주지 않으신 걸까.

로키의 절망적인 음식솜씨는 다음과 같다. 발렌타이 데이 날 버터와 마가린을 착각한 초콜렛을 줘서 스티브는 그날 화장실에서 나올 수 없었다. 맛을 확인하지 않고 설탕대신 소금을 붓는 일은 예사였고, 고기 스튜에 생선 토막을 넣어 오는 때도 있었다. 짠 맛을 중화한다며 양배추를 잔뜩 썰어넣은 카레를 가져왔을 때, 빵을 구웠는데 맛있는 향이 나지 않는다며 딸기향 파우더를 들이 부었던 때 스티브는 설마 상식안에 요리영역은 전혀 들어가지 않는것인가 절규했다. 100% 코코아 가루를 넣은 초코쿠키라는 말에 혹해 이번엔 설마 하고 입에 넣었는데 정확히 태운 나무조각 맛이 나서 토할 뻔 한 적도 있었고,  역시 가장 문제는 로키는 음식이 적당히 익는 타이밍을 단 한번도 맞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로키는 스티브가 이 세상에서 만난 가장 섬세하고 순수한 아이였다. 진실을 말해서 상처입히느니 자신의 위장이 이 정체불명의 탄수화물과 장렬히 전투를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거의 얼굴빛이 흑빛이 된 스티브를 눈치채지 못하고, 로키는 칭찬을 기다리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스티브가 그 쟁반을 다 비울 때 까지 기다렸다.
그날 스티브는 밤새 화장실에서 나올 수 없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로키는 혼란스러웠던 청소년기를 잘 넘겨가며 이제 어른의 문턱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스티브와 보낸 시간동안, 로키는 밉쌀스럽지만 얼굴이 단정한 미소년에서 위태로운 느낌이 드는 묘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 위태한 분위기는 로키의 중성적인 외모와, 나른한 색기가 원인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독특하다는 것은 정말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 끌었다. 스티브는 로키가 귀여웠다.  로키를 만난 이후, 자신의 세상에서 그보다 선명한 존재는 없었다.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주 시시한 농담에 잘 웃어주고, 스티브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스티브 자신보다도 더 괴로운 얼굴을 하는 로키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로키가 여자였다면, 진즉에 사귀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프로포즈를 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키는 남자였다. 스티브는 마음을 누르고 눌렀다. 


그 날은 아주 평범한 날 중 하나였다.
 
사실 스티브는, 로키와 자신이 단순히 아는 형동생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둘은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서로가 알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니 스티브는 로키가 자신의 손을 잡고, 혹은 품을 끌어안는 대담한 행동 후에, 눈물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 머리 좋고 자존심 강한 아이 답지 않게 온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채,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상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반대도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로키가 자신에게 잘해준데다, 둔한 편인 스티브 자신이 눈치챌 만큼 로키의 감정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로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로키를 사랑했고, 당연히 로키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래서 스티브는 떨리는 목소리로, "네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라며 내심 기뻤던 혹은 기대했던 로키의 고백을 거절했다.
 그 순간 스티브는 로키의 얼굴이 순식간에 첫 만남의 표정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로키는 마치 잔뜩 금이 간 유리창 같이 예민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것이 타인에 대한 혐오가 아닌 두려움으로 보였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로키는 스티브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정이 많고 제대로 사랑을 베풀 줄 알았다. 로키가 보여주는 것들은 크건 작건, 마음이 가득 담겨 있어서 받을 때 마다 스티브의 마음은 로키의 색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기쁘게도 스티브가 이룩한, 로키와 함께 키운 유대였고 애정이었다. 그런데 부서진다. 이 순간으로 부서진다. 스티브는 다급하게 무너지려는 로키를 붙들어 껴안았다. 울지마. 내가 있잖아. 괜찮아. 되는대로 중얼거리자 거짓말쟁이! 라며 로키가 떨면서 비난했다. 로키가 스티브에게 날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닌데, 그런게 아닌데. 스티브는 심장이 쥐어 짜이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기엔 스티브 안에서도 로키의 존재가 너무 커졌다.

"바보! 싫어요, 죽어요! 놔줘요, 상관하지 말아요! 필요없어요, 이젠 형 따위..."
"진정해 로키."
"됬어요. 어차피 내가 좋아하는 것 만큼 형은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요."
"좋아해. 충분히 좋아해."
"그럼 왜 거절하는데요."
"그야, 당연하잖아. 우린 남자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로키의 비명같은 쇳소리에 스티브는 깜짝 놀랐다. 로키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너무나 엉망 진창이었다. 스티브는 로키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하지만. 직접 살아보니 알겠다. 세상은 로키가 생각한 것보다 정말로 편협했다.

"그야, 우리 둘다 남자니까. 결혼 못하잖아. 내가 널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단말이야."


로키는 마음 속으로 기함했다. 연애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결혼? 당신 무슨 20세기 초반에 왔어?
 
어이가 없었지만 로키는 머리가 좋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 상황을 100% 이용해야만 했다. 이제 스티브 앞에서 내숭을 떨다가 뒤돌아서 못해먹겠다며 혼자 이불을 발로 차는 짓은 안녕이다. 
로키는 일단 몸으로 유혹할까 오늘은 한 걸음 물러서고 다음을 기약할까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기껏 이 고지까지 온 것이 너무 아까웠다.

"보통 애인을 사귈 때 결혼까지 생각해요?"
"난 해."
"결혼 안하는 관계는 연애하면 안되는거에요?"
"무책임한 교제를 할 수 없어. 그건 상대방에게 실례되는거야."
"형은 저랑 결혼 안해줄꺼에요?"
"네 가족을 생각해. 나는 고아니까 누구도 슬퍼하지 않아. 하지만 너희 부모님과 형은 상처받으실 수도 있어."
"그건 제 인생이니 상관하지 않으셔도 되요."
"사귀게 된다면 네 인생에 벌어지는 일들이 내가 상관할 바가 되는거야."

어련하실까. 로키는 인상을 찌부렸다. 스티브는 외모는 세련되었는데 사고방식은 그의 패션센스만큼이나 구식이었다.

"어쨌건, 저랑 사귄다 해도 형이 절 책임질 필요 없는데요." 
"난 남자니까, 사랑을 하면 책임을 져야해."
"그럼 저랑 책임을 나눠요. 이젠 형에게 사랑해달란 소리는 안할거에요."

로키는 똑바로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스티브는 로키의 강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던 소녀같은 로키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제가 형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아주 마음이 강한, 일편 단심의 소년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스티브는 두근, 하고 자신의 심장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로키에게 감히 No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스티브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열었다. 허락의 음성이 나오자마자 로키는 그제야 안심하고 스티브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소녀같은 로키가 목표였는데 상큼하게 목표에서 멀어졌습니다 으아아아아아

대부분 반응은 요리 망친 부분이 너무 현실적이라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사실 제 경험도 제법 들어가있습니다 ㅠㅠㅠㅠㅠ

Posted by Karin(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