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9. 03:41

어느 종교의 경전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한다. - 태초에 빛이 있으라.
아니, 그것은 틀리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어둠이었고, 나중에 태어난 것이 빛이었다.
심연 안에 모든 것이 잠들어 있었다. 바라보아도 알수 없는 어둠의 경계가 세계의 시작이었다.
어둠의 계보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전해내려왔다. 그들의 발전속도는 빠르지 않았으나 무시무시하게 긴 세월을 살아왔다.
태초의 민족. 그것이 전설보다도 먼저 존재한 다크엘프의 자부심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은 언어를 배웠고 그들의 행동은 세련되게 정제되었다.
워낙 긴 세월을 내려오며 계급 간 격차가 커졌기에, 감히 그 상하관계를 뒤엎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대체로 잔학무도하였으며 따라서 강력했다.


말레키스는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그의 권위는 지옥의 신의 협력을 얻음으로써 더 완벽해 졌으며, 비틀핸드, 웜우드, 그렌델을 비롯한 산하 신하들은 역대 왕에 비해 대담하면서도 공정한 왕을 지독히도 사랑하였다. 왕의 인기는 사실 그의 외모와 선정에서 비롯된 바가 컸다. 다크엘프의 기준에서 왕은 어둠의 민족 치고는 사실 얼굴의 일그러짐이나 요철이 적고, 균형이 맞았다. 키가 크고 뼈대가 단단하였으며, 움직임에 절도가 있어 왕의 행차를 보고 감격하여 우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말레키스는 대체로 독특한 성미는 아니었으나, 모든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절대 권력이 집중되는 왕에게 환심을 사고자 오래된 가문의 장들이 그렇게 애를 썼건만 말레키스가 제 곁을 허락하는 이는 궁 안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무렴 어떠랴. 말레키스를 모시는 신하들은 오히려 한 가문을 편애하지 않는 공명정대한 왕을 칭송하였다.

아침의 회의에, 말레키스가 은빛 자수가 섬세하게 새겨진 도톰한 흑빛의 망토를 이끌며 걸어와, 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서 대신들을 내려다 볼 때 신하들은 복잡한 생각을 잊었다. 자신의 출신을 잊었다. 깊은 그림자로도 가려지지 않는 은빛의 눈동자가 한명, 한명에게 시선을 맞출 때마다 그들은 상기했다. 왕이 저희의 충을 아시나이다. 저희는 왕의 뜻을 이룰 자 이외다. 왕은 늘 첫 어전을 시작하기 전 엷게 미소를 짓곤 하였다. 파르르, 한 무리의 날 짐승이 대궁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서야 왕은 시작하자, 나의 아들들이여 라고 아침 문안의 시작을 알렸다.
- 우리의 왕 저희의 아버지 이 별의 지배자시여.
신하들은 외치고 외쳤다. 완벽하게 지배당하는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까맣게 채웠다.
왕은 자신에게 도취된 아랫것들의 아양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지만 말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여, 한동안 이어지는 만세 삼창을 구경하였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지도 수천년이라, 고독 속에서 받는 칭송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왕은 깍지를 끼고 만 백성을 내려보았다. 이 세계에서 그보다 높은 자는 없었다. 



그 스바르트 알프하임에는 한 가지 큰 기우가 생겼다. 바로 왕이 최근에 맞이한 아스가르드 출신 왕비가 무척이나 교만하여, 감히 다크엘프의 수장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무척이나 대담한 행동이었다. 홀홀 단신으로 당장 적으로 돌아설수 있는 땅으로 와서, 자신의 편 하나 없는 이 궁정에서 그 오만한 태도라니. 장로들은 자존심이 상해 속을 끓고 있었고, 시녀들은 단 한번 손이라도 잡으면 여한이 없을 왕을 무시하는 로키에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단 로키는 자신의 공간으로 주어진 방과 정원 이외의 장소를 잘 돌아보지 않았다. 다크엘프의 땅 따위 볼 필요도 없다는 듯한 그 태도에 궁정에선 끊임없이 불만이 터져나왔다. 우리 왕비님은 왕도 사랑하지 않고 나라엔 관심도 없으시다나봐. 계시던 곳을 잊지 못하는 게겠지. 아무리 현재 스바르트 알프하임이 아스가르드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는 하나, 역사로 따지자면 엄연히 아스가르드보다 몇 천년은 앞선 긍지있는 땅이었다. 게다가 아스가르드 쪽에서 알프하임과의 평화를 위해 먼저 제의했던 결혼 이기에, 다크엘프의 장로들은 뒤에서 왕비에 대한 불평 불만을 쏟아내었다.

그보다 더 알수 없는 것은 말레키스의 태도였다. 말레키스는 냉랭한 로키에게 이상할 정도로 너그러웠다. 제멋대로 구는 로키의 행동을 모두 감싸안을 뿐만 아니라, 로키가 요구하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었다. 아스가르드가 두려워 제 2 왕위계승자 였던 로키를 보살핀다고 하기엔 말레키스의 행동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말레키스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로키에게 반한 것 같진 않았다. 말레키스의 행동은 담백했다. 왕은 대체 무슨 생각이시람. 대신들은 머리를 싸맸다. 
- 애초에 외부의 존재를 왕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빛의 자녀라니 선례도 없지 않는가.
- 사실 왕비 저하는 엄밀하게는 어둠의 태생이 맞다. 그는 서리거인의 태로 태어나 오딘의 날개 안에 거둬졌을 뿐이다. 그 하얀 살결 밑에는 우리와 닮은 피가 흐르리라.
- 그러나 그 오만한 자태를 보라. 태초에 빛보다 선행하였던 것이 어둠이다. 그의 외관은 저 건방진 태양의 자손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 대체 왕비는 어느 정도로 우리의 왕을 무시하는가.
- 믿을 수 없지만.
대신 중 하나가 은밀히 목소리를 낮췄다.
- 왕비가 왕과 밤을 보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하더이다.
혼인했던 날 둘이 첫날밤에 같은 방을 쓴 것은 맞지만, 침소를 정리했던 시녀에 의하면 그날 왕과 왕비가 동침한 흔적이 전혀 없고 했다.
자손을 낳아 다크엘프의 번영에 일조하긴 커녕 왕과 내외하는 왕비라니. 결국 대신들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 왕에게 말씀을 올립시다. 더는 이 모욕을 참을 수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아스가르드 인을 우리들의 어머니로 올린 것은, 그가 여인의 몸이 아니어도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두말할 수 없는 태초 어둠의 피를 이은 증거 때문입니다. 이제 왕비는 자신의 의무를 다 해야합니다.
- 왕은 어디에 계십니까?
- 왕비저하에게 가셨다고 합니다.
- 오늘도 그 교활한 왕비는 이 과일을 가져다 달라, 저 물건을 구해달라 하고 있는 거군요.
지체할 수 없었다. 대신들은 일제히 왕비의 뜰로 향했다. 다행히 왕이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쉽게 왕의 발길을 잡을 수 있었다.
- 왕에게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 무엇인가.
- 저희 장로 일동은 그저 이 세계의 번영과 왕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 말이 거창하군. 고하고 싶은 바가 무엇이기에 서두가 이리 긴 것이냐.
- 삼가하오나, 저희는 왕비님의...
- 잠깐.
말레키스가 손을 들었다. 
- 나의 비가 오고 있다.



왕의 눈길이 닿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무슨 바람인지 정원 이외로 잘 외출도 하지 않던 다크엘프의 왕비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로들은 당황했다. 다크엘프는 기본적으로 위계질서가 강한 나라다. 아무리 왕비가 이세계의 사람이긴 하나, 그들의 뼛속 깊이 새겨진 관념으론 감히 왕비의 앞에서 직언을 할 수는 없었다.
일단 왕에게 말을 올리는 것은 미뤄야 할 일이었다. 왕비의 시야에 그들이 든 이상 왕비의 허락 없이는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신하들은 침묵한채 왕비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솔직히 아름다웠다. 그의 피부는 다크엘프의 그것과 비슷하게 하얀 편이었으나, 은은한 홍조가 맴돌았다. 다크엘프에겐 낯선 혈색이 추하기 보다는 묘하게 사랑스러웠다. 왕비의 눈썹은 섬세하게 다듬어져있고, 콧대는 높았으며 남체임이 분명함에도 얼굴 선이 고왔다. 행동은 괘씸하였으나 과연 최고 왕족의 피가 흐르는 자.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음이 빠른데도 느렸다. 나풀거리는 옷깃 뒤로 하얀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로키는 눈을 내리깔고 걷다가, 문득 왕의 무리를 발견했다. 로키는 웃을 듯 말듯 입술을 그러올렸다. 그리고 잠시 발길을 멈춰, 왕이 서있는 곳을 향해 목례를 했다. 숙인 이마에 섬세하게 새겨진 장신구가 로키의 움직임에 따라 찰랑였다. 그 잔상의 주변으로 옅게 빛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대신들은 실례인 것도 잊고 아직도 얼굴이 낯선 이 세계의 왕비에게 넋을 놓았다. 왕비가 서 있는 곳만 공기가 달랐다.

왕 또한 절도 있게 비에게 목례로 답을 했다. 로키는 인사를 받는둥 마는 둥 시선만 홀낏 준채, 그대로 왕을 지나쳐 다른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여전히 예의없는 태도였지만, 눈으로 직접 목도하니 이상하게 감히 그 행위를 비난할 수 없었다.
무척이나 긴듯한 짧은 시간이었다. 말레키스는 왕비의 일행이 완전히 사라지자, 자신의 충신들을 내려보았다.
- 말하고 싶던 바가 있었느냐.
- 아닙, 아닙니다. 
충신들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흩어졌다. 왕비가 사라진 곳에, 은은한 향이 남았다. 













로키는 이 나라의 미용법이 마음에 들었다. 욕조에 정인의 피를 섞어 몸을 담근다. 무척이나 자극적이구나.
기본적으로 물에 약한 편이라 목욕은 즐기지 않지만, 왕의 피로 몸을 적시는 왕비라니. 아홉 세계를 뒤져도 이런 풍습은 발견하기 쉽지 않으리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비밀스러운 통로로 로키의 방에 다다른 말레키스는 전라의 왕비를 감상했다.
처음 만난 날, 로키는 말레키스가 다크엘프 임을 알고 서리거인의 모습을 하려 했지만 아스가르드 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망설였다. 이를 눈치챈 말레키스는 로키가 원하는 모습으로 지내도록 배려했다.

"제 평판이 엉망이던데요."
"정정하길 원하나."
"절대."

로키는 몸을 휙, 돌려 욕조 안으로 몸을 숨겼다. 말레키스는 낮게 웃으며 사랑스런 비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지 마세요. 옷이 젖습니다."
"어차피 벗을 건데 무슨 상관인가."
"말리는 것도 큰 일입니다."
"그대의 곁에 머물 테니 새벽이면 마를테지."

거참. 로키는 말레키스에게 눈을 홀겼다. 이미 말레키스는 대충 겉옷을 던져놓은 채 욕조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로키는 한숨을 쉬면서도 몸을 웅크려 말레키스가 자신을 감싸안게 했다.

"세상에 어떤 왕이 이렇게 떼를 쓴답니까."
"이제 그대의 관심이 아이에게 갈테니 떼를 쓸만도 하지."

말레키스는 로키의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직 납작한 배는 어떤 태도 나지 않았다. 로키는 우울하게 말레키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형이 눈치채면 알프하임은 멸망합니다."
"그대가 나와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무슨 상관인가."
"부부의 연을 맺고 부모가 되었다면 상관없겠지만, 전 순서가 반대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설마 남자인 그대가 임신이 가능한 몸인줄 내가 알았겠는가. 그대도 몰랐는데."
"한번 더 여쭤보겠습니다만, 정말 서리거인은 성별이 구별이 없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

대답하지 않고 말레키스는 드러난 로키의 어깨에 몇번이고 입을 맞췄다.
말레키스는 다른 화제로 로키의 관심을 돌렸다.

"아이는 언제 공표할건가?"
"임신 초기는 지나야죠. 위험한 시기를 넘긴다면 뭐 더 숨기지도 못하고 숨길 이유도 없을테니 공표하게 되긴 하겠지만."

로키는 그때 자신의 뒷담화를 하던 장로들이 얼마나 놀라 까무러칠지 기대하며 후후후, 사악하게 미소지었다.
말레키스는 때로는 기가 막힐 정도로 우아하면서 때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장난기 많은 자신의 비를 보았다. 정말이지 이 아이는 팔각정같이 다채로웠다.

"무리하지 말아라. 네 몸이 우선이다."
"흠, 당신은 제가 좋아서 어쩔줄 모르겠죠? 그러니 순진한 절 꼬드겨 냉큼 임신시키고 낚아챘지."
"그대가 순진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다."

로키는 말레키스와 눈을 마주쳤다.

"너의 강함보다는 약함에 눈을 사로잡히고. 너의 완벽함보다는 너의 결점에 이끌렸으며. 너의 아름다움 보다는 너의 추함에 반했지."
"취향 한번."
"그런 네가 있을 장소를 주고 싶었다."

로키는 그만 고개를 숙였다. 분명 수도는 잠궈져 있는데, 조용한 욕실에 뚝, 뚝 하고 뜨거운 물방울이 내리앉았다.











엄청엄청 우아한걸 쓰자고 목표했는데 결과는... 음... 그래도 말레키스와 로키의 케미가 좋아서 만족했습니다.

Posted by Karin(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