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9. 03:39

에릭 렌셔의 집은 가난했다. 학교를 계속 다닌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자, 소년은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주변의 어른들 대부분처럼 막노동을 했지만 며칠만에 다리를 다쳐서 나온 병원비가 그동안 번 돈보다 많았다. 앉아 있을 수 있는 직업이래서 공장에 취직했지만 텃세가 심한 작업반장에게 잘못 보여 잘렸다. 상심한 소년에게 아는 사람이 한번 자신의 친척에게 일을 배워보겠냐고 권유했다. 소년은 그 분이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었다. 시장에서 일한다고 들었어. 어쨌건 돈을 벌려면 장사를 배워야 하잖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소개받은 사람은 생선가게 사장님 이었다. 소년이 잘 부탁드린다고 고개를 조아리자 사장님은 그래, 잘해봐. 힘들꺼야 라고 말하며 어깨를 탕탕 두드려 주었다. 

소년은 수하물을 옮기는 등의 잡일만 했으나, 곧 사장의 명령으로 잔기술인 회를 뜨는 법을 배웠다. 경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소년에게 조금이나마 잔기술을 익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이 시장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 에릭같은 소년들은 평생 허드렛일만 하며 몇 년씩 일을 해도 월급이 제자리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소년은 자신의 운에 감사했다. 시장의 사람들은 대부분 사는 정도가 비슷비슷했다. 어차피 진짜 부자들은 시장에서 직접 물건을 사지 않을테니, 이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란 기껏해야 중산층일게 뻔했다. 소년은 그들과 미래의 자신은 거의 비슷한 위치일거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열심히 일해서 언젠가 자신도 다른 손님들처럼 남의 가게에서 이것 저것 잘난척 하며 물건을 고르고 좀 깎아달라고 떼도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럼 자신도 남들과 같은 위치가 되는 거겠지. 소년은 시간이 가는게 너무나 즐거웠다.

일을 알려준 선배는 무뚝뚝하지만 저녁엔 술도 가끔 사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엔가 선배는 점장님에게 소년이 생각보다 손재주가 있어서 실전에 빨리 투입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소년은 자신이 완전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좋냐?"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처음엔 비닐부터 벗기구, 머리꼬리 자를 때 손님이 못 보도록 등으로 잘 가리고.. 아 또 뭐라고 했지 내가?"
"신중하게 한답시고 천천히 하지 말고 빨리 하라고.. 그래야 능숙해 보인다고."
"그렇지. 그리고 손 베지 말고. 니가 손 다치는 게 문제가 아니고 생선에 피라도 묻었다간 물건값 통째로 월급에서 빠지거든."
에릭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하다가 한 번 제대로 베인 적이 있었는데 그 날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그나저나 겨울에 일하게 되서 좋진 않네."
"왜요? 여름에 시작하면 비린내 나고 생선이 상하니까 겨울이 좋지 않나요?"
하이고, 생각짧은 놈. 선배는 혀를 끌끌 찼다.

연습과 실전이 다르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에릭은 가게가 오픈하고 세 시간 째 쉴틈없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

사장의 가게는 손님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겨울에 왜 이리 회를 많이 먹는거야, 시발, 작작 좀 처먹지. 에릭은 마음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손님에게 헤실헤실 웃었다. 손님들의 얼굴도 제대로 못보겠다. 그냥 붉고 부들부들한 것들을 일정하지도 않은 두께로 대충 썰어서 넘겨주었다. 시장에서 뜨는 회는 횟집이나 일식집에서 처럼 일정하게 뜰 필요는 없다. 그저 먹을만하게, 적당히, 하지만 더러워 보이지 않게 끄름만 잘라주면 되는 거였다. 워낙 저렴한 가계였기에 사람들은 군말없이 삐뚤빼뚤한 에릭의 작품을 받아갔다.

"다 되었습니다."
"저 두마리 떠달라고 했는데요."
"네?"
"에릭, 이 멍청아!"
뒤에서 한창 도미 가운데를 발라내던 선배가 곧바로 튀어나왔다. 선배는 할말이 없어진 에릭을 대신에 허리를 굽씬거리며 손님에게 사과했다.
"아휴, 죄송합니다, 헤헤.. 한 접시에 따로 해드릴게요."
"아 좀 물어보고 해주지 거참.. 아니 사온 고기를 따로따로 싸주는 법이 어딨어."
"어휴 그렇죠 그렇죠, 괜찮으면 다시 두 접시에 두 마리 다 올려드릴게요."
"거참 빨리 가야하는데.."
"금방 됩니다, 좀만 기달려 주세요."
에릭은 눈치껏 손님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손님의 요구대로 조심스레 두 접시에 두 마리의 생선을 올렸다. 짜증이 나서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시발 처음 잘못 담는거 봤을 말하던가!

겨울이라 방어, 숭어가 잘 나갔다. 광어도 빠지지 않고, 우럭을 추가해 달라는 사람도 있고, 대부분 매운탕 거리도 같이 주문했고, 와사비 빼달라는 여자도 있었고. 양념장도 쏠쏠하게 매출에 도움이 되었다. 척 봐도 아가미가 검붉은데 그걸 사와서 떠달라는 손님도 있었다. 보는 눈도 없는 호구새끼. 이런걸 왜 회로 먹어? 널린 게 날생선인데. 갓 죽은거랑 오래 지난 것도 몰라? 하지만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이젠 손에 감각이 없다. 손이 얼어 제대로 모아지지도 않았다.
에릭의 손은 붉다 못해 푸르딩딩했다. 동상에 걸리면 어쩌지? 하지만 쉴 수가 없다. 손님들이 자신의 도마 앞에서 길게 줄을 섰기에 선배가 알려준 요령대로 난로에 손을 가져다 댈 짬도 내지 못했다.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 한시간 전이었다. 뭣 때문인지 무려 6키로어치 횟감에 매운탕용 생선까지 따로 주문이 들어왔다. 크리스마스 전날이니 친척 모임이라도 하는걸까. 에릭은 탈진한 머리로 우리 친척은 코빼기도 안비친지 몇년이 되가더라 생각하며 선배가 다듬어놓은 생선 조각을 받았다. 너무 힘들었다. 칼을 쥔 에릭의 오른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 없었기에 에릭은 왼손으로 칼등을 눌러가며 비틀비틀 횟감을 자르고 있었다.

"안 추우세요?"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잘 들리는 목소리었다. 에릭은 순간 소란스럽던 시장이 일순간에 조용해 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푸른 빛이었다. 손님은 에릭 자신과 비슷한 나이인것 같았다. 하지만 손님의 얼굴은 훨씬 고운 편이었고, 체구는 자그마했다. 입고 있는 옷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색깔이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검은색 머리인가? 약간 갈색인것 같기도 하고.. 웨이브진 머리가 남자인데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크리스마스인데, 고생하시네요."
"아, 아뇨... 제 일이니까.."
그 손님은, 마치 많은 일을 맡겨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님들이 에릭의 월급을 만들어준다. 그 사실은 에릭도 손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고마웠다.
에릭은 가슴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에릭은 우물쭈물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손님 중에 제일 많이 사신 것 같아요."
"네."
이번엔 손님이 쑥쓰럽게 웃었다. 에릭이 봤었던 어떤 여자보다도 이 손님이 더 예쁜 것 같았다. 
에릭은 최대한 집중해서 최대한 일정한 간격으로, 가장 예쁜 모양으로 회를 떴다. 손님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비닐 봉지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손님은 고개를 숙이며 에릭에게 인사했다. 에릭은 놀라서 자신도 허리를 푹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세요."
"네, 네..." 
에릭은 손님이 떠나자, 얼어붙었던 자신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찰스 자비에가 어렸을 적,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세뇌하다 시피 반복한 말이 있었다. 
어머니는 엄한 분이셨기에, 그녀가 강조해서 그 말을 반복할 때마다 찰스는 조용히 자신의 발 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은,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뉜단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이지."
어머니는 허리를 꼿꼿히 세우고, 그러니 너는 네가 받은 혜택에 감사해야 한단다, 라고 선언했다. 찰스는 어머니의 것이었다.

찰스의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이었다가, 다시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과거형인 이유는 대지주의 딸이었던 어머니가 찰스를 낳자 마자 아버지와 이혼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의 이름만 꺼내도 치를 떨게 분명했기에 찰스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시장출신이라는 것, 다정한 사람었지만 돈이 많은 찰스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나서 사람이 변해버렸다는 것 정도가 찰스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였다.
찰스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가끔 서민들이 이용하는 시장에 가보곤 했다. 무서워서 감히 아버지를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 곳 사람들의 피가 일부 자신에게 흐르는 것인지, 낯설고 지저분한 시장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정감이 갔다.

찰스는 과일 가게도 돌아보고, 선물 가게에서 필요없는 물건을 사기도 했다. 꽃을 파는 소녀에게 선의를 배푼 적도 있었고, 괜히 중고 책 가게에서 할일없이 서적을 뒤적이기도 했다.
정육점의 비위생적인 풍경에 놀라기도 하고, 시장 물건 치고 꽤 훌륭한 장식장을 보며 이걸 산다면, 어떻게 몰래 옮길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 찰스는 짧은 비명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가자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소년이 생선을 나르다 발을 헛디뎠는지 맨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생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가게에서 뚱뚱한 아저씨가 나타나 소년의 뺨을 쳤다. 찰스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에릭, 머리는 어디다 둔거야!! 이런것도 제대로 못하냐!"
"죄송합니다."
"멍청이! 잘리고 싶냐!!"
소년은 이 추운 겨울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소년은 맨 손으로 흩어진 얼음과 생선을 줍기 시작했다. 찰스는 그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옷은 물에 적셔져 있었고, 얼굴은 지저분 했으며 소년의 손은 왜인지 상처 투성이였다. 찰스는 자신이 울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의 아버지가 이 곳에서 찰스를 낳아 키웠다면 저 소년의 운명이 찰스 자신의 운명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소년이 어느 정도 생선을 수습하고 가게로 사라졌다. 찰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가게로 갔다. 가게 앞엔 소년이 생선을 줍는 동안 전혀 도와 주지 않았던 덩치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찰스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여기, 사장님이 누구신가요?"
"사장님은 안에 계십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손님?"
"됐네, 로건! 들어가게나!"
중년의 사장은 돈을 많이 벌었기에, 비싼 물건에 관해 눈썰미가 있는 편이었다. 
찰스의 옷은 이 시장 사람들이 평생 월급을 모아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고급품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도련님?"
"저, 방금전 소년 말입니다만, 혹시 오늘 일로 해고 되는 것은 아니겠죠?"
"해고요? 아, 일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에게 부탁받은 녀석이라서 맡아두고는 있습니다. 오늘 일로 해고를 한다는 건 좀 너무하지만, 이런 실수가 잦은 녀석이니 좀 나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기, 그 소년에게 잘 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무언가 기술을 배우게 한다거나."
찰스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도련님. 도련님의 말씀이 아주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 그렇다면 저도 도련님에게 부탁을 드려야 한답니다."
"어떤 일인가요?"
"저희 집에서 한달에 한번, 거래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도련님의 용돈으로 충분하겠지요. 어려우시다면 하인을 시키셔도 됩니다. 금액은 상관 없습니다."
"아."
찰스는 머리가 좋았다. 찰스는 이 가게의 사장이 어떻게 이렇게 까지 큰 점포를 소유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장은 이그재비어 가라는 인맥을 확보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분명 찰스의 용돈 정도로도, 이 거래는 성립할 수 있었다.
"꼭 생선이 아니어도 됩니다. 이 시장의 1/5은 저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뇨. 생선으로 할게요. 대금을 치룰 테니, 제 개인 명의로 적당한 곳에 기부할까 합니다. 저희 가문의 이름은 쓸 수 없습니다만.."
"충분합니다. 도련님은 현명하신 분이시군요."
찰스는 어머니가 후원하려다 깜빡 잊었던 고아원으로 적당한 양의 물품을 매입해 보내기로 했다. 
그럼, 하고 돌아서는 찰스에게, 사장이 한마디 더 붙였다.
"에릭 렌셔라고 합니다."
"사장님의 성함이요?"
"아뇨, 그 생선을 엎었던 소년 말입니다."
"아. 아뇨, 전 그가..."
찰스는 뒷말을 잊지 못하고 시장을 빠져나와 달렸다. 그러고보니, 찰스는 소년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하지만 가게로 돌아가서 사장에게 거래를 취소하자고 말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로건은 의아한 얼굴로 도련님이 사라진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은 싱글 벙글 웃으며 로건과 같은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 그 도련님은 뭔가요?"
"...로건. 지금 당장 에릭 렌셔에게 기술을 가르쳐. 그리고 최대한 빨리 손님을 접하게 해."
"잡일만 시키게 할 것 아니셨습니까?"
"아니."
사장의 눈빛이 빛났다. 승부를 잡았을 때의 표정이었다.
"저 녀석은 유통까지 키워야 해."

 

에릭 렌셔가 모르는 새 그에게 찰스 자비에의 영향은 엄청나게 미치고 있었다.
일단 선배는 에릭에게 많은 것들, 이를 테면 좋은 것과 좋지 않지만 빠른 것, 돈이 되는 것들을 일러주었다.
에릭이 일하는 곳은 수시로 바뀌어서 어떨 때는 물류 쪽에, 어떤 때는 경매 쪽에, 어떤 때는 재고파악 쪽으로 불려가 에릭은 정신없이 일을 배웠다.

찰스는 에릭이 일하는 가게에 제법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에릭이 자신을 알게 되어도 할 말이 없었기에 찰스는 에릭이 일하는 곳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 
가게가 워낙 넓었기에, 사장실로 곧바로 올라가버리면 전혀 마주칠 수 없었다. 사장은 찰스를 가장 중요한 손님에 준해 대접했다. 찰스의 성씨를 듣고 그의 집안을 확인하고 난 후 사장은 더더욱 찰스에게 친절했다.
"사장님. 아무리 그래도 저에게 너무 신경을 써주시는거 아닌가요. 제가 많은 금액을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도련님. 도련님의 용돈은, 에릭 렌셔의 월급 보다 많답니다."
"네?"
"에릭 렌셔 말입니다. 도련님이 호의로 봐주고 있는 그 녀석이요."
"에릭 렌셔라고 하는군요."
"한 번 도련님이 오셨을 때 만나신적 있으시다고 하던데, 에릭과 같이 있던 직원에게 물어보니 에릭은 도련님을 모르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아, 네."
"아무리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직접적으로 그에게 월급을 주거나 후원하는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말하지 말아주세요."
"음, 확실히 직접적으로 도련님이 그에게 도움을 주느 것은 아니지만, 사실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사장은 현명하게 말을 줄였다. 굳이 여기서 도련님은 에릭랜셔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신원을 보증하고, 일자리에서 유리한 위치에 오를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는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찰스도 사장의 의중을 눈치채고 화제를 전환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나이는 아마 도련님과 비슷할 겁니다. 집안이 어려워 의무교육을 간신히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 머리는 나쁜 편이 아닙니다만. 조금 조용한 성격이긴 하지만 대체적으론 성실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요?"
"그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직접 만나 물어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네?"
"퇴근은 보통 7시입니다. 마침 지금 시간이 거의 다 됬군요."
사장은 마음 속으로 미소지었다. 이 도련님이 자신이 주어온 말단 직원에게 푹 빠져 있다니, 자신의 성공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찰스는 사장의 요구를 수락했다. 그날 찰스가 주문한 생선은 지금까지 주문한 양 중 최고로 많았다.

오늘도 힘든 하루였다.
에릭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일 전에 역할이 바뀌어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에릭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장은, 자신을 훈련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배워야지. 에릭의 눈이 빛났다.
퇴근하려 가게 문을 나서자, 에릭은 익숙한 사람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 자신을 보고 마치 아는 사람인것 처럼 환하게 웃는 소년. 단 한번 만났지만, 알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 손님이시군요."
"네, 맞아요. 그 날은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찰스는 방긋, 웃었다. 에릭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쪽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지금 퇴근하시는 것 같은데, 식사 하셨나요?"
"아, 아뇨."
"괜찮으시다면, 저랑 식사하러 가셔도 괜찮으실까요?"
"네!!"
에릭은 곧바로 대답했다. 여자친구가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 만남은 마치 데이트 같았다.

둘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서로 이름을 알고 나서, 식사를 마치자 마자 둘은 말을 놓았다. 찰스는 뻔질나게 에릭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왔다. 에릭은 찰스를 만날 때면 전날 부터 목욕을 하고, 수돗가에서 미친듯이 손을 씻고 양치를 했다. 머리카락을 물에 적신 후 다시 머리를 세팅하고, 입술이 튼 부분엔 같이 일하는 누나를 졸라 연고를 발랐다. 

찰스는 화제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동갑이라고 했는데, 잘사는 집 아들이라서 그런지 정말 똑똑했다. 에릭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 둘의 '데이트' 비용 부담은, 다행히도 1:1에 가까웠다. 어째서인지 에릭이 유통쪽으로 배치되면서 성과급이 나왔기 때문이다. 에릭의 월급은 처음 가게에 취직했을 때 보다 두 배 이상 올랐다. 에릭은 찰스가 좋아하는 과자와, 찰스의 눈 색깔을 연상시키는 머플러를 선물할 수 있어서 기뻤다. 찰스는 고민하는 얼굴이었지만, 비싼 물건이 아님을 연거푸 확인하고 나서야 선물을 받았다. 
"난 에릭, 네가 나에게 선물을 하는 것보다 네가 번 돈은 너를 위해 썼으면 좋겠어."
"나를 위해 썼어. 찰스 너에게 선물하는게 지금 상태에선 가장 내가 원하는거야."
찰스는 살짝 웃었다. 에릭은 넋을 읽고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찰스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좋은 품질의 옷에,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에, 상냥한 표정을 하고 있다. 에릭은 찰스를 볼 때마다 현실감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확실하다. 에릭은 사랑을 한 적은 없었지만, 찰스가 자신의 첫사랑이란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찰스. 너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뭔데?"
"난 너를 볼 때마다, 네가 남자인걸 잊어버려."
"남자 맞는데."
찰스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에릭은 찰스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에릭은 조심스럽게 찰스의 볼에 손을 대었다. 
찰스의 미소가 멈췄다.
"감히 너에게 키스해도 될까."
"에릭..."
"네가 너무 귀한 사람이라 무서워. 그러니까 내 말은, 너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에릭."
찰스는 자신의 볼에 올려진 에릭의 손을 꽉 잡았다.
"제발 나에게 키스해줘, 에릭."

에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릭의 입술이 찰스의 입술에 닿았다가, 벌어져 그 달콤한 선물을 혀로 풀어헤쳤다. 찰스는 눈을 감고 에릭의 키스를 받으며, 자신의 얼굴을 감싼 에릭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성탄제 날, 처음으로 손님으로서 에릭을 만날 날. 너무나도 차가워 보였던 에릭의 언 손을 붙잡아 녹여주고 싶었다. 찰스의 소원이 지금에야 이루어 졌다. 

Posted by Karin(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