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9.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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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9. 05:51

자가노스와 바야짓은 정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바야짓 뿐 아니라 자가노스에게도 위험한 도박이었다. 무엇이 둘을 이렇게 묶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이미 벌어진 일이고 서로 당분간 이 관계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두 사람은 1년에 두어번 밖에 만나지 않으면서도 섹슈얼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자가노스는 장거리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장치를 얻은 셈이었고 신관은 뜻을 관철할 도구를 얻은 셈이었다.


최근 도성 내 소문이 흉흉하다. 장국 무즈라크의 술탄이 친동생을 품는다 한다. 어찌나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드는지 하렘에 발길이 끊긴지 오래이더라.
장제는 루머를 듣고 입술을 떨었다. 친형제 간 동성애라니 사상 최악의 스캔들이었다. 실제로 있을 수 없는 소문이 파다한데도 술탄은 모른척 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떤 종류의 압박인건가.
일단 바야짓은 서둘러 자가노스에게 전보를 쳤다. 애초에 신뢰받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 의심많은 사람이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물의 신전에는 자신과 외향이 비슷한 시동을 세운 후, 바야짓은 서둘러 장국으로 향했다.

자가노스는 톡 톡 검지로 책상을 두들겼다. 악의적인 소문에 불쾌해야 할 이유야 있었지만 사실 자신은 침착했다. 이런 소문이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술탄과 장제, 두 사람의 사이는 정상적인 형제 관계가 아니었다. 어쨌건 장제가 굳이 국경을 넘어 해명하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이미 국경을 넘어올 자유가 있다는 것 자체가 소문이 거짓임을 반증하는 것이겠지. 자가노스는 자택에 사람을 몰리고 밤에 찾아올 손님을 기다렸다.

사막의 밤은 쌀쌀하다. 바야짓은 한숨을 쉬며 몇 달만에 찾아온 정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조용히 문이 열렸다. 그리웠던 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졌다.

"보고싶었습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신건가, 장제." 

바야짓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자가노스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불쾌했구나. 

"소문에 대해서라면, 거짓입니다."
"알고 있다." 
"그런 것 치고는 미행이 붙었던데." 
"보험은 많을 수록 좋지."

그것이 당신의 말버릇이었지요. 바야짓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가노스는 봐도봐도 적응이 안되는 미모의 정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차를 들이켰다.

"저는 신뢰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있겠나. 나는 누구도 무엇도 믿지 않아."
"제게 붙인 미행은 형님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도 있으시겠지요."

자가노스는 형님이라는 말에 인상을 썼다. 술탄 바라반. 머리아픈 상대였다. 애초에 신관에 대한 친형의 집착은 장난이 아니었다. 자가노스는 살을 섞은 첫날 신관이 성경험이 없었다는걸 확인했을 때 물의 정령이 가호하셨군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형제애? 어느 형이 동생의 몸을 훑으면서 본단 말인가. 자가노스는 술탄이 장제의 초상화를 몇십개나 가지고 있다는 것에 기함을 했다. 그 행위도 정상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알려져도 상관 없다는 태도도 기가 막히다.

"어쨌건 저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바야짓은 자가노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가노스는 이 형제의 문제는, 술탄 뿐 아니라 장제 본인에게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장제는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만, 남성성을 억누른 행동가짐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묘한 가학심을 가지게 한다. 상당한 미인인 장희의 옆에 있어도 기죽지 않는 그의 미모도 남심을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겠지만, 남색가들의 입에서 장제의 이름이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는 성직자 같은 분위기도 한몫하는 것이 분명했다.
안되겠다. 오늘의 자신은 역시 냉정하지 못하다. 자가노스는 침착을 잃은 이유를 생각하지 못하고 고개를 몇번 좌우로 흔들었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른다."
"잠깐, 제 눈을 보십시오." 

바야짓이 자가노스의 손목을 잡았다. 

"소문에 마음 상하신 것 압니다." 
"하? 마음이 상해? 그깟 소문과 내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내 심기가 거슬린단게냐." 
"어쨌건 자신이 품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밤을 보냈다는 소문이 났는데, 기분이 좋을리 만무하잖습니까."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자가노스는 부정할 수는 없었다. 가슴안에서 흉흉하게 소용돌이 치는 것이 정체를 드러내기 직전이었다.

"장제께서는 내가 질투심이라도 느낀다는 것인가."
"네."

바야짓은 확신했다. 자가노스의 미간이 찌부려졌다. 더 말을 잇지 못하는 자가노스를 대신해, 바야짓이 천천히 자가노스가 자신도 모르게 꽉 쥔 손을 잡았다.
바야짓은 자가노스의 주먹을 들어올려, 천천히 자신의 볼에 대었다. 자가노스의 손이 약간 떨렸지만, 곧 손가락이 빠져나와 바야짓의 볼을 만졌다. 

"당신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정치 속의 약속 뿐 아니라, 정인으로서 믿음까지 드리기 위해."

자가노스는 거칠게 손을 뺐다. 부드러운 온기가 기분나빴다.
이 남자는 늘 이렇다. 그냥 체스말이면 체스말 답게 잠자코 판 위에서 춤을 추면 될 일이다. 아니면 판을 거절하고 언젠가 자신의 간계 위에서 제거되던지. 그것이면 된다.
마치 무엇이고 바칠 것처럼 둘 개인적 감상을 보여줄 이유는 없었다. 자가노스는 수많은 보고를 떠올렸다. -술탄이 장제에게 술을 따르게 했습니다. 술탄이 장제를 희롱하였고 장제는 그것을 웃음으로 넘겼습니다. 장제가 늦은 밤 술탄에게 불려갔습니다. 술탄이 장제를 데리고 먼 곳으로 갔습니다. 장제가 술탄을 보는 눈이 여전히 친애가 가득합니다. - 

자가노스는 숨을 들이마셨다. 당장 그 어느 밤 취했던 때처럼 신관의 옷을 망가뜨려 품에 안고 싶었다. 하지만 술이 없었다.
자가노스는 어금니를 씹었다. 아무것도 이 남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무엇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대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도 못한채 자가노스는 바야짓을 노려보았다. 

"하나만 물어보지. 형을 죽일 수 있겠나."
"네?"
"필요하다면 당신의 손으로 형을 살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건."

바야짓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바야짓은 작은 소리로 형님께서 정말로 이대로 뜻을 꺾지 않는다면.. 하고 뒷 말은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럼 그렇지. 자가노스는 실망감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고 뒤를 돌았다. 바야짓은 다급히 자가노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이곳에 온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가노스는 의아한 얼굴로 바야짓을 보았다. 

"무슨 이유인가?" 
"전 당신에게 확신을 드린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증명할 텐가?" 

바야짓은 자가노스에게 단호히 말했다. 

"제 몸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겨 주십시오."

자가노스는 바늘과 잉크, 소독을 위한 램프를 준비했다. 문신은 드문 양식은 아니었다. 단지 장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내용도 아니었다. 언젠가 장제에게 어떤 지방의 노예제도에 대해 말했을 때 몸에 상처를 내고, 염료를 사용하여 문신을 남긴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바야짓은 얇은 옷감을 걸치고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자가노스가 바늘을 불에 달구어 소독한 후, 바야짓에게 다가가자 그제서야 겁을 먹은 듯 몸을 움추렸다.

"부위는?" 
"자, 장군이 결정해 주십시오."

자가노스가 바야짓의 목 쪽으로 손을 뻗자 바야짓이 퍼드득 놀라며 몸을 움추렸다. 
옷감을 쥐고 어깨로 넘기자 얇은 실크 재질이었던 그것은 스르르 뒤로 넘어가, 새얀 신관의 나신이 드러났다. 바야짓의 몸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가노스는 아까의 불쾌한 기분을 잊고, 바야짓의 피부 위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덧그렸다. 팔의 라인을 한번 타고 내려가, 다시 등 쪽으로 올라가 견갑골 부위에서 검지를 뱅글뱅글 돌렸다. 

옆구리를 쓰다듬자 하윽 소리와 함께 바야짓이 앞으로 웅크러 드렸다. 참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뜨리자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팽팽하게 선 유두가 눈에 들어왔다.
자가노스는 바야짓의 귀에 대고 음란한 말을 지껄였다. 바야짓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자가노스는 참지 못하고 바야짓의 하반신을 풀어해치고 해후를 나누기 시작했다.

 

정사로 지친 바야짓과 이야기를 나누고, 결국 문신은 깊숙한 쪽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물의 신관이기에 의식상 물에 몸을 담근다던가 시종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는 것이 흔했기에, 치골 위쪽 부위에 작은 삼각형 두개를 그리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마취약을 사용할 테지만 기본적으로 바늘을 이용한 시술이기에 고통스러울 수 있다."

바야짓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가노스가 준비한 진통제를 먹은 후, 입에 옷감을 문채 침대 위에 바로 누었다.
자가노스는 자신의 침대 위에 거의 전라로 누워있는 왕손을 바라보았다. 온 몸엔 자신이 안았던 흔적이 가득하고, 허벅지 사이에선 자신이 흩뿌린 정액이 아직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가노스는 떠오르는 정복감을 무시하고 천천히 바야짓의 살갗에 바늘을 꽂아넣었다.

"...!!"

바야짓의 몸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자가노스는 경직되었다 풀어지는 근육을 세심히 관찰하며 바야짓이 적응하는 시간에 맞춰 조각을 세기기 시작했다.
살을 균일한 깊이로 꿰뚫는다. 치골과 가까운 얇은 부위의 피부를 찌르자 바야짓이 참기 힘든지 매트를 손이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그러쥐었다.

"하..."

금방 바야짓과 자가노스 양쪽 모두 몸이 흠뻑 젖었다. 마침내 위쪽의 삼각형을 완성하고 바야짓을 바라보니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제사장에게 바쳐진 양 같군. 자신이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자가노스는 자신도 모르게 상냥하게 바야짓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바야짓은 자가노스를 바라보았다. 너무 아팠다. 뱃속까지 불로 지지는 것 같았다.
비슷한 부위를 몇번이고 찔러 이제 감각이 없어질 만도 한데도 바늘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찔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만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알고 있을까? 자가노스 장군은 지독하게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은 어쩌면, 자신의 형님에게서 자주 보았던 표정과도 닮아있었다.

마침내 문신이 완성된 순간 결국 통증을 참지 못하고 바야짓은 혼절했다.
자가노스는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고귀한 신관을 바라보았다. 
눈물과 땀과 피와 정액으로 덮여진 이 아름다운 인간이 신을 모시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얇은 피부위에 새겨진 문신을 바라보았다. 그것이 이 남자의 소유가 자신임을 외치고 있었다. 

치솟는 사랑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가노스는 자신이 새긴 상처에 입을 맞췄다.









모처에서 리퀘를 받고 썼는데 우와우아우아아아 완전히 취향이었습니다 하악하악

Posted by Karin(카린)
2014. 3. 9.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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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9. 05:48
어렸을 때 바야짓과 바라반은 그저 우애가 좋은 형제 사이었다. 의례 왕정에는 혈육간에도 살벌한 왕위 다툼이 있었으나 바라반은 천성이 왕이엇고 바야짓은 타고나길 겸허한 현자였다.  이 어찌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사람들은 두 형제를 칭찬했으며, 그것은 또한 바야짓의 자랑이었다.

"바라반, 사람들이 우리를 뭐라 일컷는지 아느냐."
"무엇이라 하더이까."
"네가 날 좋아하는게 너무 티 난다 하더라. 넌 욕심도 없느냐."
"제가 당신을 따르는 것은 제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느냐. 넌 좋은 아우구나. 바라반은 웃으며 바야반은 동생의 곱슬머리를 만지작 거렸다. 
바야짓은 바야반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개었다. 형님이 너무 좋아,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문득 바야짓은 이 존경심을 표현할 좋은 수단을 생각해냈다. 언젠가, 아버지가 아끼는 신하가 아버지에게 예를 표하기 위에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본 것이다. 그 순간 아버지와 그 충신의 유대는 가족이나 부부의 연보다 강해보였다.

"형님. 제가 잠시, 당신의 동생이 아니어도 괜찮겠습니까."

바야짓은 바야반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어, 그의 손등의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저의 길은 당신을 향해 있으며, 저의 몸은 당신을 위해 살 것이며, 저의 혼은 당신을 위해 죽을것입니다."

바라반은 마치 왕족이 아닌 자처럼 자신에게 인사하는 바야짓을 껴안았다.

"바야짓, 내 유일한 아우이자, 내 가장 충실한 신하될자여,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라."
"무엇이든지 형님이 원하는 바를 말하겠습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것을 허가한다."

바야짓은 기꺼이 고백했다. 그 때는 그 말이 그렇게 당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3년이 지났다. 그렇게 나이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바라반과 바야짓은 한 피를 받은 자식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체구가 차이가 났다.
바야짓은 16세가 되었는데도, 성적 발달이 늦되었다.
어느날 밤 바야짓은, 바라반의 방에 자신의 책을 놔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아침에 자신을 아껴주는 스승에게 돌려주기로 한 귀중한 문서인데, 곤란했다. 바야짓은 서둘러 바라반의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 누구 없는가."
"바야짓 왕자님."
"방해해서 미안하네. 형님이 아직 주무시지 않는다면, 잠깐 형님의 방에 들어가도 괜찮을까? 놓고 온 것이 있어."
"곤...곤란합니다, 바야짓 왕자님."

바야짓은 당황했다. 물론 자신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바라반이 있으니 거의 없는 것이긴 하나, 엄연히 자신은 술탄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청이 거절당하다니? 바야짓은 재차 시녀에게 물었다.

"곤란하다니, 형님의 명령이 있었나?"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시라면 제가 전언을 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바라반이 바야짓의 방문을 거절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혹시, 형님이 아프신걸까? 바야짓은 걱정이 되었다.

"역시 내가 형님의 방에 가봐야 겠다."
"바야짓님!!"

시녀는 절박하게 외치며 바야짓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바야짓은 당황해서 발길을 멈추었다.
시녀는 왕자에게 거역한다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차세대의 술탄에게 미움을 살까 두려워 목숨을 걸고 바야짓을 말렸다.

"바라반님은 지금.. 침소에 혼자 있지 아니하십니다."

바야짓은 순간 시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시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자, 바야짓은 충격을 받았다.





바야짓은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아무리 순진한 바야짓이라도 지금 바라반이 누군가와 잠자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성적으로 늦된 편이지만, 형님은 누가 보아도 매력적인 사람이니 마음에 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설사 애인이 아니더라도 술탄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후궁을 취할 자격이 있었다.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 처음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어지러웠다. 엎드려 빌었던 시녀의 얼굴도 제법 예쁘장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녀도 형님과 잤을까?

바라반은 털썩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보고 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바라반님은 지금 침소에 혼자 있지 아니하십니다, 바라반 님은 지금 침소에 혼자 있지 아니하십니다, 바라반 님은 지금...

"..."

눈물이 안쪽부터 차올랐다. 안구가 뜨거워졌다. 눈가를 따라 주르륵, 슬픔이 흘러내렸다.
왜 몰랐나. 나는 바보인가. 상상도 못했나. 왜 이렇게 됬나. 어째서 우나. 형님이 아무렴 나만 예뻐라 하실거라 생각했나. 자신도 형님도 언젠가 사랑을 하고 여인을 안고 자식을 만드리란걸 몰랐던건가.

"....욱..."

그런데 왜 눈물이 멈추지 않는걸까. 바야짓은 그날 아무런 소리없이 두 식경 가량을 울었다. 
그날, 바야짓은 처음으로 몽정했다.



바라반은 최근,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 동생이,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사이가 좋았기에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바야짓은 오늘 점심을 먹지 않는다고 했나."
"네, 바라반님. 실례지만 바야짓 님은 급한 일이 있어 궁성 밖으로 나간다 말하셨습니다."

이게 몇번째야. 한 두 끼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요즘 자신의 방에 전혀 찾아오지 않은지 2주가 되어간다.
형님, 앞으로 형님이 술탄이 되신다면 이런 정책은 어떠하신지요, 이 병법이 쓸만할 것 같습니다 조잘대던 대화가 끊긴지도 오래되었다.
설마. 바라반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마음에 품은 여인이라도 생겼나. 그러고 보니 바야짓도 어연 17세였다. 
하지만 바야짓에게 붙인 밀정에게선, 어떤 정보도 들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이냐. 왜 네 멋대로 돌아다니는거야. 바라반은 불쾌감에 얼굴을 찡그렸다.




산책이라는 핑계로 형과의 만남을 피하고 있던 바라반은, 형님의 황당한 명령에 아연실색했다.

"제 방을 형님과 합친다구요?"
"네. 최근에 고민이 많아 보이셔서, 좀 위로가 필요하시다고 합니다."

바야짓은 얼굴에 핏기가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날 이후, 거의 매일밤 바야짓은 음몽을 꾸었다. 처음엔 꿈 속에 형님이 자신을 꽉 끌어안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그 꿈에서 자신은 마치 더 애정을 갈구하듯히 형님에게 몸을 비비고 있었다. 그러면 형님은 자신이 유혹하는 대로 입을 맞추어 주었다... 말도 안될 일이었다. 들키면 아버님에게 추궁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님에게 경멸받을거다. 이 세상에 어떤 동생이 제 피를 나눈 형님의 사랑을 갈구한단 말인가. 그 뿐 아니다. 자신을 경계하여 형이 술탄에 오른 직후, 자신을 궁 밖으로 내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도 이제 성인인데, 형님이 그렇게 신경쓰실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라반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야짓 님이십니다."

거짓말! 바야짓은 바라반이 침소로 끌고 들어간 여자의 수가 이미 자신의 양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라는것을 알고 있었다.

"형님과 제가 지나치게 친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건은 도가 지나칩니다."
"하지만 바라반 님의 명령이신데..."

이건 거절할 수밖에 없다. 형님과 오래 같이 시간을 보낸다면, 이 마음을 들킬 지도 모른다. 마음을 숨길 수 있다 하더라도, 아침마다 제 형에게 안겨 신음하는 꿈을 꾸고 앞섶을 더럽히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런 때가 온다면 수치심에 혀를 깨물고 자결할 거다.

"제가 직접 거절하러 가겠습니다."

바야짓은 괴로워 하면서도 오랫만에 형님을 만나게 됬다는 것이 너무나 설레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자신이 보기에도 우스꽝 스러웠다.

"바라반 왕자님. 바야짓 님이 오셨습니다."

이제야 왔나. 바라반은 엄한 목소리로 들어오도록, 이라고 말했다. 무려 몇 주만에 만나는 동생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적이 없었다. 바라반은 동생을 심하게 꾸중하려 했지만, 바야짓의 얼굴을 보고 순간 숨을 집어 삼켰다. 
굳이 말하자면 바야짓은, 남자로서는 일국 제일의 미남이었다. 그런 그의 꽃처럼 화사하던 얼굴은, 이루 말할수 없이 그늘이 져 있었다. 바라반이 바야짓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보드랍던 피부가 까슬하니 메말라 있었다.

"바야짓, 혹시 몸이 안좋았느냐. 얼굴이 상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던 바야짓이 고개를 들어 바라반과 눈을 마주쳤다. 
괴로움에 비뚤어진 동생의 모습은, 제 혈육이라 믿을수 없을 정도로 처연하게 아름다웠다. 

"형님...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바라반은 바야짓의 갈라진 입술이 달짝이는 것을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바라반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취했기에, 바야짓이 제 동생이 아니면 몇번이고 안지 않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 바야짓의 외모는 기억하던 것 보다도 절색이었다. 내 동생이, 이런 표정을 하던 아이였나? 이런 목소리로 떨던 자였나? 맙소사, 전신이 바르르 떨려 부서질것 같은 자신의 동생은 너무나도 가냘프고, 안타까웠으며, 아름다웠다. 마치 실에 매달아 고정시킨 나비같았았다. 
바라반은 자신의 하반신에 열이 뻗치는 것을 느꼈다.
아득한 사랑스러움에 바라반은 바야짓을 와락 껴안았다. 바야짓의 어깨는 작았지만, 자신이 품었던 여인들보다는 단단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에 꽉 들어차는 몸이었다. 바라반은 동생을 껴안는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바라반은 깨달았다. 그런가. 내가 원한 상대가 너였나.

 "아니다. 괴로웠던 듯 하구나."

바라반은 바야짓을 변하게 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지 ? 누구냐? 왜 말을 하지 않았냐. 왜 내 허락을 받지 않고 네 마음을 빼앗겼느냐. 감히, 나를 두고. 마음을 자각하자 마자 독점욕에 미칠것 같았다.

 "말해. 누구 때문에 괴로워했어."

바라반은 바야짓의 어깨를 와드득, 움켜쥐었다. 바야짓은 고통에 허덕였다.
바야짓은 차마 형님을 연모하여 괴로웠다고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쩌지?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제, 제가 있을 곳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걸 왜 생각해."

바라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야짓을 쳐다보았다. 이 나라의 엄연한 제 2 왕위 계승자가, 무슨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형님은 요즘 형님의 혼사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알다마다. 맘에 드는 상대가 없어 고르고 있었지. 바라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아니고 제 동생의 반만큼만 예쁘고 똑똑하고 성품 좋고 충성심 강한 여인을 구할래야 구할 수가 없었다.

"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라반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모르던 바는 아니었다. 어쨌건 바야짓도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전 가정을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네 뜻대로 하면 된다."

바라반은 바로 대답했다. 동생이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나 전전 긍긍했는데, 도리어 결혼할 생각이 없다니 매우 잘됬다.
바라반은 며칠간의 짜증이 한번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넌 후계의 책무에 얽메여 있는 몸도 아니니 결혼을 하여 자식을 보건, 네 혼자 살건 그 누구도 널 탓할 수 없다. 내가 탓하게 두지도 않을거다."

바야짓은 형이 호언장담을 하자 그제야 베시시 웃었다. 확실히 형인 바라반은 자신의 일이라면 끔찍하게 위했다. 조금 비약해서 말한다면, 혹시 바야짓을 모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라반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 녀석의 혀를 뽑으라 할테지. 
이렇게 자신을 어여삐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눈물이 차올랐다.

 "...바야짓?"

바라반은 당황했다.

"바야짓, 어째서 눈물을 보이느냐."
"형님. 저도 이제 성인이고, 제 갈 곳을 정했습니다."

형의 앞이라 그만 울고 싶었지만 사실 계속 울면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당신이 내 삶의 이유였다.그래, 작별을 할 때다. 

"형님. 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정결한 몸으로 살까 합니다."

그것이 가능이나 할까. 대체 침대위에서 형의 이름을 부르며 혼자 음란한 망상에 빠져있던 것이 누구냐. 이런 자신에게 내릴 신따위는 없다. 
왜 나는 이렇게 자라난 걸까.
알수 없었다. 태어나길 분명 자신은 그런 생물이 아니었다. 형님과의 아름다운 추억은 이미 자신의 그릇된 욕망으로 더럽혀졌다.

"형님, 저는 물의 정령을 받겠습니다."
"신관이 되겠다고? 너, 제정신이냐?"

신관.
그들은 일생 부정을 타서는 안된다.
말을 조심하라. 먹는 것을 조심하라. 입는 것을 조심하라. 
눈길을 조심하고, 손길을 피하며, 음욕을 피하고, 사욕을 피하라.
 걷는 걸음을 경거히 내딛지 말며, 움직임을 망령되이 놀리지 말라.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 버리고 버리고 버려라.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 인간이, 일생을 시체같이 살리라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형님, 제가 그곳으로 가는게 형님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날 우습게 보는거냐 바야짓!!!"

바라반의 노성이 방을 울렸다.

"넌 네가 스스로 무덤속으로 걸어가야만 내가 술탄이 되겠다고 말하는거냐!! 나 바라반이 너에게 그렇게 밖에 안되는 한심한 후계지인것이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형님, 그게 아닙니다."
"누구야! 어떤 놈이 널 협박했지! 그런게 틀림없다!!"

분명히 자신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 대신이 자신의 마음약한 동생을 꼬셔낸게 틀림없다. 바야짓을 술탄으로 올리게 힘을 보탠다고 했겠지.
바야짓은 자신의 존재가 바라반의 후계자 자리를 위협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신관이 된다는 말도 안되는 선택지를 고른게 틀림없다.
바라반은 화를 참을수 없었다. 어떤 자식이야. 당장 요절을 내주마. 가루를 내마. 감히 내 동생을 협박해? 감히 나와 내 동생을 이간질해? 감히 내 동생을 이렇게 괴롭게해?

"거기 누구 없느냐!!!"
"형님, 진정하세요, 아닙니다, 오해에요 형님, 형님..!!"
"놔!! 바야짓, 네가 혼자 그런 생각을 했을리 없다! 누구야, 죽일거다, 죽여버리겠어!!"
"모든건 저 혼자 생각한 것입니다!!!"

바야짓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뭐?"
"궁을 떠나는건 저 혼자 결정했습니다!"

네가 왜? 이건 내가 아는 동생이 맞는가? 나와 한 배에 태어나, 평생을 살을 부대끼며 자란 나의 형제가 맞는가? 내 부모보다도 소중한 네가 맞는가?

"저도 이제 성인입니다. 형님... 이제 숨막힙니다, 이상해요, 저흰.. 너무 친밀했잖습니까."

바야짓은 말하는 내내 심장을 움켜쥐고 있었다. 하지만 바야짓의 말투는 차츰 고요해졌다.

"저도 이제 형님에게 독립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바야짓은 웃었다. 그건 바야짓의 눈물보다 슬픈 표정이었다. 바라반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무언가 원할 필요도 없었기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 순간 바라반은 태어나 처음으로, [결핍]을 느꼈다.
그렇기에 바라반은 현재 정확하게 자신의 심정을 묘사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동안 침묵했는데도 바야짓은 자리를 뜨지 않고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야짓이 떠난다. 내 동생이 이제 궁에 없다. 아마 앞으로 만나기 힘들것 같다. 

"바야짓, 난 지금..."

바라반은 겨우 정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할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었어."




바야짓의 눈이 충격으로 크게 커졌다. 바야짓은 그제서야 자신의 그저 자신의 감정에 허우적 거리느라 형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바라반을 괴롭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바야짓은 감히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가."

이게 현실이라는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떠난다고 했는데 형이 자신을 버리는 것 같았다.
어쩌지? 어쩌지?
이렇게 끝나는거야? 이렇게 슬프게?
외롭다. 무서워. 끝났다. 끝나버렸다.  눈은 무언가 보고 있는데 뇌가 까매서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바라반이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넌 이제 날 사랑하지 않아."

그때 바야짓은 폭발했다. 바야짓은 바라반에게 달려갔다. 자신의 애틋한 사람을 껴안았다. 바라반도 힘차게 바야짓을 껴안았다. 
바라반은 비통하게 외쳤다. 넌 날 버리면 안되! 바야짓은 대답하지 않았다. 바라반은 협박하듯 애원했다. 네가 떠난다면 죽여버릴꺼야.바라반은 웃었다. 죽이세요 형님. 제가 이 성안에 있는 한 살아도 산게 아닙니다. 바야짓도 웃었다. 바라반은 순식간에 미소를 잃었다.  그걸 보고 바야짓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형은 어금니를 악물며 말했다. 거짓말 하지마.
아, 형님. 사랑하는 나의 왕. 그 높은 사람이 고작 자신 때문에 눈안의 실핏줄이 터진채 흔들리고 있다.







제목조차 못붙였습니다 ㅋ...ㅋㅋ
2편은 배드씬이 나오기 때문에 암호가 걸려있습니다. 암호는 성인이신 지인분에 한하여 알려드리려 합니다.
Posted by Karin(카린)
2014. 3. 9.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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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9. 03:49

이 세계의 신은 몇 가지의 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인간의 몸에 나타나는 표식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자비로운 신께서는 그의 마음을 살피사 그가 숭배하는 대상을 그의 육체에 새겨주곤 하였다. 

어느 정도라는 것은 그 인물이 죽음이 찾아와야 끊어낼 수 있는 정도였기에, 때로는 신앙이었고 때로는 중독된 대상이었으며 보통은 깊이, 아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때문에 누군가에게 다른 이의 이름이 새겨지면, 큰 사건이 아니라면 부모들은 자식을 그 이름의 상대와 맺어주려 애를 썼다. 그것은 반대해봤자, 일단 특정인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은 자신이 죽기 전까지 다른 사람을 전혀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보통 자신이 사랑하는 만큼 자신에게 사랑을 되돌려 주는 신뢰 관계 위에서 깊이 안심하고 사랑해야만 이름을 발현했다. 그래서 보통 이름이 떠오른 이들은 그 관계가 비극으로 가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찰스와 에릭의 집안은 양가가 대대로 신앙 깊은 집안이었다. 당연히 두 집안의 교류로 활발하였다. 찰스는 에릭과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다. 두 아이가 네살이 될 무렵부터 찰스와 에릭의 집안 사이에는 먹구름이 꼈다. 에릭의 아버지는 기존 교단의 해석에 대대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신학교수였다. 찰스의 가문은 대대로 전통적인 신앙을 지켜오는 정통파 장로 집안이었다. 가까웠던 두 가장은 각자가 자신이 속한 그룹에서 높은 자리에 갈 수록 서로에게 날을 세웠고, 그들의 부인도 서로를 눈엣가시로 여기며 여기저기에 상대방의 치부를 흘리고 다녔다. 겨우 여섯 살이었음에도 찰스는 집안의 변화를 눈치챘다. 하지만 에릭과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좋은 찰스는 어머니 몰래 에릭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에릭. 네가 보고 싶어. 에릭 또한 찰스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도 마찬가지야. 1년 후 편지를 발견한 아버지는 화를 내며 찰스를 먼 지방으로 보내버렸다. 찰스는 슬펐지만, 아이였기에 방법이 없었다.

에릭의 얼굴이 희미해 졌지만,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에릭의 존재는 찰스에게 더 깊어졌다. 찰스는 에릭처럼 예쁜 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에릭처럼 고어를 잘 읽는 어린이도 본 적이 없었다. 에릭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없었다. 에릭같은 존재는 없었다. 에릭과의 세세한 추억을 잊어갈수록 에릭과 마음 찡할 정도로 강한 교감은 더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어째서인지 이유를 알 수 없던 찰스는, 12살 때 우연히 참가한 마을에 결혼식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신랑과 신부는 간만에 서로의 이름이 나타난 커플이었다. 신랑은 신부의 이름이 무려 목덜미에 새겨졌으며, 신부는 손가락에 새겨졌다. 신랑은 신부의 손가락에 새겨지 자신의 이름에 입을 맞추고, 신부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신랑의 목부분에 얼굴을 묻고 자신의 가문의 이름에 키스했다. 찰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둘의 모습에 자신과 에릭을 대비했다. 에릭. 얼굴은 잊었으나 내 가장 귀한 보물이여. 그때였다. 찰스는 자신의 왼쪽 허벅지가 갑자기 인두로 지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찰스는 그 후로 2주일을 앓았다. 각인 의식의 시작이었다. 찰스의 부모는 내심 찰스가 대체 어떤 이름을 달고 나타날지 기대했다. 아버지는 서둘러 시골로 내려왔을 정도였다. 어느 어여쁜 처자려나. 그러나 심한 통증으로 눈을 뜨지 못한 찰스보다 먼저 찰스의 상흔을 확인한 아버지는 충격으로 그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버지는 온 몸에 열이 오른 찰스를 매질로 깨우고 다시 매질로 기절하게 만들었다. 찰스는 이유도 모르고 맞다가 간신히 어머니에 의해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을 수 있었다. 충격으로 떨고 있던 찰스는 자신의 허벅지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놀랐다. 친구의 이름이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는 울면서 찰스에게 말했다. 찰스. 남자가 좋으니? 찰스는 그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찰스, 에릭이 좋아? 하지만 에릭의 집안은 반역자가 되었어. 그러니까 에릭을 만나면 안돼. 찰스는 왜 에릭네 집이 반역을 했어요? 라고 물었다. 에릭의 아버지가 기존 교리를 뒤집어 엎고 교회의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종파를 만들어 버렸어. 정말이지 미친 집안이야. 에릭네 집안은 악마가 된거야. 그러니 엄마랑 약속하렴. 에릭을 만나지 않는거야. 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네 집안이 만든 새 종파는 기세를 무섭게 확장해 나갔다. 찰스는 시골에서 차분히 기존 교리를 공부하고 있었다. 사실 찰스가 보기에도 현재의 세계관은 기존 신의 말씀에 인위적으로 각색한 부분이 많았다. 현대에 전혀 적용할수 없는 말도 안되는 악습도 있었다. 몇몇 구절은 애초에 몇천년이 지나면서 단어의 뜻이 오용된 흔적도 보였다. 오히려 에릭의 종파가 주장하는 구절중엔 일부는 해석의 오류로 볼 수 있는 구절이 있었으나 치명적이지 않았고, 현재의 신앙보다 좀더 건설적인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종교란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다. 아버지의 자랑이자 삶의 모든 것이었던 종교적 신념을 정면에서 반박할 정도로 찰스의 신앙은 깊지 않았다. 하지만 가문의 세계관을 이어받으면서도 찰스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구세력과 신세력의 차이를,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의논하였다면 양쪽 모두에게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종교가 절대인 기성세대들에게 랜셔 가가 포함된 신세력과 자비에 가가 주도하는 구세력은 서로의 존재를 용납치 아니했다.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절대권세를 휘두르며 각종 악습이 가득하였던 구세력을 참지 못하고, 신세력은 결국 가뭄이 심하던 해 말도 안되는 종교세를 거두는 구세력의 예배당을 향해 폭동을 일으켰다. 찰스와 에릭이 함께 다녔던 교회까지 습격받은 날 저항하던 찰스의 아버지는 그들의 엄청난 피습에 돌아가셨다. 찰스는 그날 당주가 되어 긴급히 중앙회의 소집에 응했다. 교주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신의 권위를 보입시다. 그 후 수많은 사람이 죽이고 죽었다.

 

찰스는 신세력에 저항하면서도 그들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자제하였다. 그것을 눈치챈 신세력도 찰스가 맡은 부분에서는 차츰 과격한 행동을 피하게 되었다. 처음엔 공격적이기만 했던 신세력도 지속전에 지쳤는지 자신의 영토를 확보하고는 더 이상 기존 신자들을 회유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신론자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덕분에 구세력도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종전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각 편의 제법 높은 신관들이 몇 번 형식적인 밀서를 보내고, 몰래 으슥한 곳에 모여 밀약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들었다. 휴전이 찾아왔다. 

찰스는 전쟁을 하면서도 그것이 끝난 후에도 에릭 렌셔를 미친듯이 찾았지만, 찰스의 아버지를 살해한 죄목으로 렌셔 가의 모든 가족이 구세력에게 몰살당했다는 정보를 듣고 오열했다. 그가 죽어도 자신이 죽지 않은 이상 허벅지의 낙인은 풀리지 않는다. 찰스는 그 누구에게도 사랑을 느낄 수 없었고 무엇에도 현실감과 충만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인생을 떠받쳐야 했을 가장 큰 기둥이 없었기에, 찰스는 공허함을 잊으려 하룻밤의 사랑들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사실 구세력의 타락은 몇 백년 전부터 진행됬기에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매춘과 불륜도 성행하였다. 찰스는 주변 신자들의 행동을 많이 봐왔기에 딱히 죄의식 없이 여러 사람과 관계를 가졌다. 사실 찰스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가 더 있었다. 찰스의 허벅지에 각인한 대상의 이름이 적혀있는 이상 그 누구도 찰스와 지속적인 관계를 가질 리 만무했다. 

전쟁의 공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오르게 된 찰스의 유일한 취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 세계는 신이 직접적인 능력을 보이기 때문에 신앙심이 없는 자가 드물었다. 아이들이 커서 자신의 아버지나 에릭의 아버지 같은 경직되고 배타적인 신앙관을 갖게 할 수 없었다. 또 다른 찰스와 에릭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찰스는 고아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에게 최대한 다양한 의견이 나올수 있도록 의견을 가르쳤다. 찰스는 박학다식한데다 그의 집안이 워낙 저명하였기에 각지에서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를 찰스에게 보냈다. 학교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공적인 일이 잘 풀려도 찰스의 마음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찰스는 평소와 같이 기도를 마치고, 뒷 골목의 음란한 구역으로 걸어갔다. 평신도들의 눈을 피해 고위 신앙인들이 모이는 비밀 가게인데, 이곳의 존재 자체가 구세대의 양면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찰스는 테이블에 앉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평소에 고고한 척 신을 믿는 척 순결한 척 내숭을 떨던 이들이 정욕에 눈이 멀어 시뻘개진 눈과 혈색이 오른 뺨을 숨기지 못하고 서로를 욕정어린 눈으로 탐색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가게안의 공기조차 거북했다. 이젠 이곳도 질리나보다. 찰스는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자신의 옆에 누군가 앉았기에 생각 없이 옆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각인을 한 이후 처음으로, 찰스의 심장이 움직였다.

그 남자의 외모는 정말로, 고아했다. 그의 얼굴또한 금욕적이고 단정하였지만, 그가 두르고 있는 수도사같은 분위기 또한 그를 특별하게 보이게 했다. 정말로 신을 믿는 사람이란 이런 느낌일지 모르겠다. 찰스는 신앙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그 신비한 남자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아니 호기심보다 경외심이 일었다. 하지만 이 가게의 목적은 분명하다. 찰스는 자신쪽에서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신도 찾지 않는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되셨습니까." 
"신이 만든 곳이기에 왔습니다." 
"이곳은 오랜 구습과 인간의 자기변명이 만들어 낸 곳입니다." 
찰스는 신세력이 구세력을 비판할 때 쓰는 문구를 인용했다. - 고인물 처럼 썩은 구습과 잠시의 타락은 인간으로서 당연하다는 자기합리화의 결정체들 같으니! 
"불완벽하게 창조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거두시는 신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그 남자는 나즉하게 웃으며 구세력이 신세력을 비판할 때 쓰는 문구를 인용했다. - 신이 인간을 만드실 때 실수로 땅에 떨구에 지혜의 눈과 선의 날개와 영겁의 수명이 사라졌더라. 그러나 신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삶을 허용하사 그 삶에 깊이 오시메 첫 인간이 구세대의 교주라. 그에게 영광을 바치나이다.

토론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구세대의 인간밖에 오지 않았기에 위험하였지만 찰스는 신경쓰지 않고 신세대의 논리 중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부분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 하였다. 그는 구세대의 당위성과 첫 신과 접촉했던 교주의 가르침을 보존하려 최대한 노력하는 태도를 옹호하였다. 밤을 세우고 찰스는 그 남자와 만족스럽게 자리를 떴다. 비록 섹스를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마음이 충만한 느낌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막스 아이젠하르트였다. 

찰스는 그 남자와 계속 성적인 뉘앙스 없이 토론만으로 밤을 보냈다. 찰스는 정말로 몇 년만에 완벽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전쟁에 그만 모든 가족을 잃고만 그의 가족사에 슬퍼했으며, 고통속에 방황하다 신앙의 힘으로 그것을 극복한 그의 확신에 감동하였고, 찰스 당신같이 건강한 동지를 만나 기쁘다는 말에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기뻐했다. 자신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드디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찰스의 몸은 육욕의 기쁨을 알고 있었다. 찰스는 어차피 첫 만남을 그러한 곳에서 했기에 조심스레 막스를 유혹하였다. 


Posted by Karin(카린)
2014. 3. 9.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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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9. 03:45

찰스 이그재비어는 의사가 내민 종이를 한참 동안이나 인상을 구긴 상태로 내려다 보았다. 열번을 보고 스무번을 보아도 결과가 바뀌지 않았다. Result : Omega(Recessive)
오메가라니. 찰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담당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자비에씨, 무언가 잘못 되었습니까?"
"전 제가 열성 알파라던가, 하다못해 베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네, 제가 자비에 씨와 상담을 했을 때 자비에 씨가 이성 관계에 있어 언제나 주도적인 역할이시고, 동성간 성관계에서도 100% 삽입하는 역할만 하셨다 들었을 때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찰스씨의 유전자와 혈액, 체향 검사 결과는 모두 동일하게 열성 오메가로 나타났습니다."
"20대 중반에도 발현하지 않는 오메가라니,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보통 오메가와 알파의 발현은 이르면 10세 때, 늦어도 15세에서 16세를 넘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찰스는 자신이 안았던 오메가 남성들을 떠올려 보았다. 오메가 남성들은 히트 싸이클이 도달하면 누군가가 삽입하기를 격렬하게 바라며, 그들의 애널은 대량의 윤활액을 분비하여 여성의 질과 거의 흡사한 정도가 된다. 그런 신체적 반응이 일어났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학계에는 30대에 발현하는 경우도 드문드문 보고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정말 드문 케이스지만, 체질이 변하는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찰스씨는 후자일 가능성도 있겠군요."
"알파가 오메가로 체질이 변하는 케이스도 있습니까?"
"그런 사례는 전혀 없습니다. 베타가 알파, 혹은 오메가로 발현되는 사례만 있었습니다."
"어쨌건 제가 오메가인 것은 분명하단 건가요?"
"네."

찰스는 평소 자신의 정력과 섹스 테크닉에 상당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을 열성 알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를 앞에 두고도 자신은 평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자극적인 상황이라 생리적으론 흥분 되었지만, 다른 알파들 처럼 오메가들에 체향으로 인해 이성을 놓을 때까지 매료됬던 적은 없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베타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알파라면 동성과 결혼해도 아이를 가질 수 있으니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베타라면 여성과만 짝을 지어야 하니 그 문제 때문에 검사를 받았던 것인데 결과는 어쨌건 동성과 결혼해도 아이는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나왔다. 단, 자신이 임신을 해서 출산하는 쪽으로.
끔찍하다. 찰스는 기운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결혼은 반드시 여자랑만 해야겠다. 오메가 남성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임신이라니, 절대 무리다.

"제가 알파가 아니라 하더라도, 왜 베타가 아닌건지 이해할 수 없군요."
"찰스씨. 찰스씨는 상대방이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알 수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네."
"당신의 성질에 관한 가장 중요한 힌트가 그것입니다. 찰스씨."

의사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조용하게 말했다.

"베타는 오메가나 알파의 체향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찰스는 그날 그대로 클럽으로 향했다. 남자를 안는 건 오늘까지만이다. 혹시 발현할 지도 모르니까 평생 억제제를 복용해야 할 수는 있겠지만, 오메가 남성도 충분히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으니 미래엔 여자랑 결혼해야지. 하지만 그 결심도 하루 이틀이었다. 찰스는 클럽에서 처음으로 오메가가 아닌 베타 남성을 만나 침대로 직행했다. 정말 애석하게도 자신은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좀 더 끌리는 사람이었다. 원래가 쾌락에 약한 편이라, 오늘만. 이번주 까지만. 한 달만 이라며 찰스는 게이 클럽을 끊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찰스는 최근 자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친 밤놀이 탓인지 미열이 있었다. 식은땀이 등과 하반신에 고였고, 몸에는 힘이 빠졌다.
오늘은 클럽에 가지 말까 고민했지만, 최근 성욕이 늘었는지 자제하기 힘들었다. 오늘만 놀고, 몸살이라도 나면 좀 끊자. 찰스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짙은 코트를 걸치고, 조용한 장소를 찾아갔다.

오늘 고른 가게는 고급스러운 느낌이 드는 와인바였다. 젊고 활기찬 사람은 오지 않지만, 조용하고 어른스러운 상대를 고르기엔 최적의 장소다. 조용히 흐르는 음악이 기분 좋다. 가게의 손님들이 억누르려 하지만 숨기지 못하는 알파와 오메가의 체향조차 달콤했다. 적당히 마티니를 시키고 가게안을 돌아 보았을 때 테이블에 앉아있는 미남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그 사람 만이 선명한 컬러로 보였다. 찰스는 미남에게 눈을 떼지 않은채 주문했던 술잔을 받아들였다. 일행이 있나? 제발 없기를. 왜 바가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 있을까?
그 남자의 주변만이 고요했다. 그 주변의 공기만 맑았다.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도리어 흐릿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검은 목 폴라티에 진회색 아우터. 수수한 취향조차 마음에 들었다. 하긴 저 남자가 극락조처럼 화려하게 입고 왔다고 해도 자신은 마음에 들었겠지. 남자는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바치고, 눈을 감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피곤한걸까? 말을 걸어도 될까? 민은 의미가 없었다. 이미 찰스는 그 남자에게 홀린 듯이 다가가고 있었다. 마치 몸이 이끌리는 것 같았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엔 각인이 있다지. 이게 그런 걸까?

"실례하지만."

찰스는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의 적극성이 이 순간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았다. 이 쪽을 경계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완벽하게 생겼다. 키가 크다. 알파일까? 하지만 알파 특유의 강압적인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메가이길 바랬지만 그런 달달한 향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기분좋은 시원한 향만 느낄 수 있었다. 이건 페로몬이라기 보단 향수다. 찰스는 그 남자를 베타로 결론내리고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일행이 있으신가요?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혼자 왔습니다. 앉으셔도 괜찮습니다."
"제 이름은 찰스 자비에입니다, 아, 진짜 이름이구요."
"에릭 랜셔라고 합니다."

그 뒤의 대화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남자에게 정신까지 매혹되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눴던 것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는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사람의 눈을 맞추고 경청하는 매너가 매우 훌륭했다. 찰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마음에 들었다.

가게를 나올 땐 서로의 입술이 엉겨붙어 있었다. 동성간 섹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Top과 Bottom, 그리고 취향이다. Steady 관계보다 원나잇이 압도적으로 많은 세계이기에 그것을 명확히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에티켓이다. 찰스는 분명히 자신은 안는 쪽이라고 선을 그었고, 에릭은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오메가 남성을 주로 안아왔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성적 기호도 합의되었다. 찰스는 남자답게 에릭을 유혹했다.

"에릭, 호텔에 가자. 네가 맘에 들어."
"알았어, 알았다고.."
"제발, 너랑 자고 싶어 죽겠어."
"너 교수라고 하지 않았어?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니 자중해야지."
"넌 흥분되지 않아?"

찰스는 확신했다. 에릭 또한 자신에게 매료된게 분명하다. 에릭은 대화 내내 단 한번도 찰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처음에 무뚝뚝하게 아래로 쳐져있던 입은 이제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 어금니까지 보일 정도였다. 에릭은 폭소하며 찰스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Posted by Karin(카린)
2014. 3. 9. 03:43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것은 변명이다. 그것은 그냥 성격이 나쁠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로키는 정말로 힘들었다. 16세의 레이더는 너무나 예민해서 소유주인 로키 조차 괴롭히고, OUTCOME 또한 어찌나 밉살스러운지 원할 때도 원하지 않을 때도 주변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돌아버리게 할 수 있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된 로키에게 타인과 맺는 관계란 아주 얇은 유리장식처럼 아슬아슬했다. 로키는 어머니의 무한한 인내 없이는 살 수 없었다. 그 위태로웠던 로키의 세계는 단 한 사람을 만남으로서 극적으로 안정되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올릴 수 있다. 처음 만날 날, 수줍게 인사하는 그의 얼굴에 수시로 불평불만을 내뱉던 로키의 입술은 감히 그 사람에게 마저 불친절할 수는 없었다. 연한 황금빛의 헤어스타일은 촌스러웠지만 그 남자가 미소짓는 순간은 너무나 완벽해서 시야가 흐릿할 정도였다.로키는 직감했다. 이미 로키의 감정은 로키의 것이 아니었다.


스티브는 토르의 집에 자주 놀러가는 편이었다. 원래 토르와는 클래스 메이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토르의 동생인 로키와도 사이가 좋아서 인지 어느새 토르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로키는 좋은 아이였다. 머리가 좋고,  남자인데도 선이 가녀리고 제법 예쁘장한데다, 언제나 예의바르고 기품이 있어 스티브도 굉장히 아끼는 동생이었다. 로키는 감수성도 예민해서 타인의 기분에 민감한데다 표현력이 풍부한 편이라, 스티브는 로키와 대화하는 것이 토르와 말하는 것보다도 즐거웠다.  로키 또한 스티브를 잘 따르는 편이라, 스티브가 놀러올 때마다 뭔가 필요한게 없냐며 쪼르르 달려와 이것저것 챙겨주곤 했다. 동생이 없었기에 스티브는 로키가 귀여우면서도 무척이나 기특했다. 

로키는 스티브가 오기 전에 자신의 방 뿐 아니라 형인 토르의 방까지 깨끗하게 정리해놓았다. 스티브가 오면 토르와 둘이서 놀고 있다가, 화제가 떨어질 때 쯤 기가막힌 타이밍에 이렇게 들어오곤 했다. 스티브가 좋아하는 원서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스티브가 로키에게 빌린 책만 이미 여섯 권이 넘었고, 음반 CD는 수를 세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심지어 로키는 자신이 선물받았던 물건 중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며 스티브에게 포장만 뜯었을 뿐인 아주 상태 좋은 옷이나 운동화 같은 것도 자주 줬다. 괜찮다고 손사례 쳤지만 스티브가 봐도 로키가 받은 물건은 로키의 취향이라 볼 수 없는 물건이라 스티브는 곧 고마운 마음으로 로키의 애용품들을 받았다. 역시 집이 잘 살기 때문에 선물도 많이 들어오는 듯 한데, 이왕이면 사용할 사람의 취향을 잘 알아보고 사주는게 좋지 않을까. 로키가 남자애라서 그런지 로키가 받는 물건중엔 로키의 체구나 취향보다는 스티브나 토르에게 맞춰진 것이 많았다. 스티브는 어부지리와 함께 역시 선물을 줄 때는 잘 알아보고 줘야 하는구나라는 인생의 교훈을 얻었다.

또한 스티브는 로키에게 자신이 그린 그림의 교정도 부탁하고는 했다. 이건 사실 토르에겐 비밀이었는데, 로키는 소설을, 스티브는 그림을 이메일로 교환하며 서로 감상이나 장단점 등을 교환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소설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저 로키의 소설에 감탄 밖에 하지 못했지만 로키는 매우 자세한 감상이나 아쉬웠던 점을 조목조목 정리해서 메일을 보내주곤 했다. 취미생활이라고는 하지만 로키의 조언 덕분에 스티브의 그림은 크게 발전했다.  아마도 스티브의 뮤즈는 로키 같았다. 사실 얼굴도 예뻐서 모델을 부탁한 적도 있었는데 무려 다섯시간이 넘는 강행군 동안 로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집중했다. 누드크로키 모델도 서주겠다고 했는데 방학이 끝나 어영부영 약속이 미뤄졌지만, 어쨌건 로키는 스티브에게 정말 고마운 동생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스티브는 로키에게 연애 상담을 한 적도 있었다. 여자친구와 다툼이 잦아졌는데, 로키는 스티브의 한탄을 끝까지 듣더니 한숨을 쉬면서 매우 객관적인 입장에서 조언해주었다. 스티브는 자신이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로키가 연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스티브는 로키의 조언을 충실히 지키며 여자친구를 체크했다. 그리고 로키가 말했던 형편없는 여자에 자신의 여자친구가 해당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티브는 로키 덕분에 여자친구와 뒤끝없이 헤어질 수 있었다.


 

오늘도 당연히 스티브는 토르에게 붙잡혀 토르의 집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너무 토르를 자주 보는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토르는 좋은 녀석이고, 스티브가 친 동생 수준으로 이뻐하는 로키까지 있으니 놀러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토르의 방에 들어서 한참 뒹글거리며 만화책을 보고 있을 때 작은 노크소리가 들렸다. 토르가 벌컥 문을 열자, 형에 비해 체구가 자그마한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스티브와 눈이 마주치자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로키는 형에게 들어와도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쟁반에 무언가 바친 채로 조심스레 들어왔다. 스티브는 그 쟁반을 보는 순간 토르의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오늘도 주께서 스티브에게 시련을 주셨다.

"오늘도 요리해준거야? 고마워. 정말로 신경쓸 것 없는데."

"스티브, 그렇게 사양 할 필요 없어. 내 동생의 요리실력은 세계 최강이라고."
스티브는 우울하게 웃으며 보기에는 멀쩡한 로키의 쿠키를 입에 넣었다. 아. 역시. 스티브는 신음했다. 
이건 쿠키와 같은 재료로 만들었으나 결과는 절대 쿠키가 아닌 그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로키는 자신은 그것을 입에 대지 않은 채 수줍게 볼을 붉히며 더 드세요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하며 접시를 밀어주고 있었고 토르는 정말 맛있다는 듯이 로키의 쿠키를 주먹째 퍼먹고 있었다. 왜 신은 스티브에게 거절할 용기를, 로키에게 음식솜씨를, 토르에게 미뢰를 주지 않으신 걸까.

로키의 절망적인 음식솜씨는 다음과 같다. 발렌타이 데이 날 버터와 마가린을 착각한 초콜렛을 줘서 스티브는 그날 화장실에서 나올 수 없었다. 맛을 확인하지 않고 설탕대신 소금을 붓는 일은 예사였고, 고기 스튜에 생선 토막을 넣어 오는 때도 있었다. 짠 맛을 중화한다며 양배추를 잔뜩 썰어넣은 카레를 가져왔을 때, 빵을 구웠는데 맛있는 향이 나지 않는다며 딸기향 파우더를 들이 부었던 때 스티브는 설마 상식안에 요리영역은 전혀 들어가지 않는것인가 절규했다. 100% 코코아 가루를 넣은 초코쿠키라는 말에 혹해 이번엔 설마 하고 입에 넣었는데 정확히 태운 나무조각 맛이 나서 토할 뻔 한 적도 있었고,  역시 가장 문제는 로키는 음식이 적당히 익는 타이밍을 단 한번도 맞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로키는 스티브가 이 세상에서 만난 가장 섬세하고 순수한 아이였다. 진실을 말해서 상처입히느니 자신의 위장이 이 정체불명의 탄수화물과 장렬히 전투를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거의 얼굴빛이 흑빛이 된 스티브를 눈치채지 못하고, 로키는 칭찬을 기다리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스티브가 그 쟁반을 다 비울 때 까지 기다렸다.
그날 스티브는 밤새 화장실에서 나올 수 없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로키는 혼란스러웠던 청소년기를 잘 넘겨가며 이제 어른의 문턱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스티브와 보낸 시간동안, 로키는 밉쌀스럽지만 얼굴이 단정한 미소년에서 위태로운 느낌이 드는 묘한 청년으로 자랐다. 그 위태한 분위기는 로키의 중성적인 외모와, 나른한 색기가 원인이기도 했다. 분위기가 독특하다는 것은 정말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 끌었다. 스티브는 로키가 귀여웠다.  로키를 만난 이후, 자신의 세상에서 그보다 선명한 존재는 없었다.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주 시시한 농담에 잘 웃어주고, 스티브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스티브 자신보다도 더 괴로운 얼굴을 하는 로키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로키가 여자였다면, 진즉에 사귀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프로포즈를 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로키는 남자였다. 스티브는 마음을 누르고 눌렀다. 


그 날은 아주 평범한 날 중 하나였다.
 
사실 스티브는, 로키와 자신이 단순히 아는 형동생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둘은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서로가 알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니 스티브는 로키가 자신의 손을 잡고, 혹은 품을 끌어안는 대담한 행동 후에, 눈물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그 머리 좋고 자존심 강한 아이 답지 않게 온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채,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상황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반대도 상상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로키가 자신에게 잘해준데다, 둔한 편인 스티브 자신이 눈치챌 만큼 로키의 감정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티브는 로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로키를 사랑했고, 당연히 로키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래서 스티브는 떨리는 목소리로, "네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라며 내심 기뻤던 혹은 기대했던 로키의 고백을 거절했다.
 그 순간 스티브는 로키의 얼굴이 순식간에 첫 만남의 표정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 로키는 마치 잔뜩 금이 간 유리창 같이 예민했다. 하지만 스티브는 그것이 타인에 대한 혐오가 아닌 두려움으로 보였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로키는 스티브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정이 많고 제대로 사랑을 베풀 줄 알았다. 로키가 보여주는 것들은 크건 작건, 마음이 가득 담겨 있어서 받을 때 마다 스티브의 마음은 로키의 색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기쁘게도 스티브가 이룩한, 로키와 함께 키운 유대였고 애정이었다. 그런데 부서진다. 이 순간으로 부서진다. 스티브는 다급하게 무너지려는 로키를 붙들어 껴안았다. 울지마. 내가 있잖아. 괜찮아. 되는대로 중얼거리자 거짓말쟁이! 라며 로키가 떨면서 비난했다. 로키가 스티브에게 날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닌데, 그런게 아닌데. 스티브는 심장이 쥐어 짜이는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기엔 스티브 안에서도 로키의 존재가 너무 커졌다.

"바보! 싫어요, 죽어요! 놔줘요, 상관하지 말아요! 필요없어요, 이젠 형 따위..."
"진정해 로키."
"됬어요. 어차피 내가 좋아하는 것 만큼 형은 나를 좋아하지 않잖아요."
"좋아해. 충분히 좋아해."
"그럼 왜 거절하는데요."
"그야, 당연하잖아. 우린 남자잖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로키의 비명같은 쇳소리에 스티브는 깜짝 놀랐다. 로키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너무나 엉망 진창이었다. 스티브는 로키가 무척이나 귀여웠다.

하지만. 직접 살아보니 알겠다. 세상은 로키가 생각한 것보다 정말로 편협했다.

"그야, 우리 둘다 남자니까. 결혼 못하잖아. 내가 널 끝까지 책임질 수 없단말이야."


로키는 마음 속으로 기함했다. 연애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결혼? 당신 무슨 20세기 초반에 왔어?
 
어이가 없었지만 로키는 머리가 좋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 상황을 100% 이용해야만 했다. 이제 스티브 앞에서 내숭을 떨다가 뒤돌아서 못해먹겠다며 혼자 이불을 발로 차는 짓은 안녕이다. 
로키는 일단 몸으로 유혹할까 오늘은 한 걸음 물러서고 다음을 기약할까 고민했지만, 그러기엔 기껏 이 고지까지 온 것이 너무 아까웠다.

"보통 애인을 사귈 때 결혼까지 생각해요?"
"난 해."
"결혼 안하는 관계는 연애하면 안되는거에요?"
"무책임한 교제를 할 수 없어. 그건 상대방에게 실례되는거야."
"형은 저랑 결혼 안해줄꺼에요?"
"네 가족을 생각해. 나는 고아니까 누구도 슬퍼하지 않아. 하지만 너희 부모님과 형은 상처받으실 수도 있어."
"그건 제 인생이니 상관하지 않으셔도 되요."
"사귀게 된다면 네 인생에 벌어지는 일들이 내가 상관할 바가 되는거야."

어련하실까. 로키는 인상을 찌부렸다. 스티브는 외모는 세련되었는데 사고방식은 그의 패션센스만큼이나 구식이었다.

"어쨌건, 저랑 사귄다 해도 형이 절 책임질 필요 없는데요." 
"난 남자니까, 사랑을 하면 책임을 져야해."
"그럼 저랑 책임을 나눠요. 이젠 형에게 사랑해달란 소리는 안할거에요."

로키는 똑바로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스티브는 로키의 강한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던 소녀같은 로키는 그 자리에 없었다.

"제가 형을 사랑하게 해주세요."

아주 마음이 강한, 일편 단심의 소년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스티브는 두근, 하고 자신의 심장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로키에게 감히 No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스티브는 바짝 마르는 입술을 열었다. 허락의 음성이 나오자마자 로키는 그제야 안심하고 스티브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제야, 모든 것이 완벽해졌다.







소녀같은 로키가 목표였는데 상큼하게 목표에서 멀어졌습니다 으아아아아아

대부분 반응은 요리 망친 부분이 너무 현실적이라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사실 제 경험도 제법 들어가있습니다 ㅠㅠㅠㅠㅠ

Posted by Karin(카린)
2014. 3. 9. 03:41

어느 종교의 경전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한다. - 태초에 빛이 있으라.
아니, 그것은 틀리다. 먼저 존재하는 것이 어둠이었고, 나중에 태어난 것이 빛이었다.
심연 안에 모든 것이 잠들어 있었다. 바라보아도 알수 없는 어둠의 경계가 세계의 시작이었다.
어둠의 계보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전해내려왔다. 그들의 발전속도는 빠르지 않았으나 무시무시하게 긴 세월을 살아왔다.
태초의 민족. 그것이 전설보다도 먼저 존재한 다크엘프의 자부심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들은 언어를 배웠고 그들의 행동은 세련되게 정제되었다.
워낙 긴 세월을 내려오며 계급 간 격차가 커졌기에, 감히 그 상하관계를 뒤엎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대체로 잔학무도하였으며 따라서 강력했다.


말레키스는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그의 권위는 지옥의 신의 협력을 얻음으로써 더 완벽해 졌으며, 비틀핸드, 웜우드, 그렌델을 비롯한 산하 신하들은 역대 왕에 비해 대담하면서도 공정한 왕을 지독히도 사랑하였다. 왕의 인기는 사실 그의 외모와 선정에서 비롯된 바가 컸다. 다크엘프의 기준에서 왕은 어둠의 민족 치고는 사실 얼굴의 일그러짐이나 요철이 적고, 균형이 맞았다. 키가 크고 뼈대가 단단하였으며, 움직임에 절도가 있어 왕의 행차를 보고 감격하여 우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말레키스는 대체로 독특한 성미는 아니었으나, 모든 이들과 거리를 두었다. 절대 권력이 집중되는 왕에게 환심을 사고자 오래된 가문의 장들이 그렇게 애를 썼건만 말레키스가 제 곁을 허락하는 이는 궁 안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아무렴 어떠랴. 말레키스를 모시는 신하들은 오히려 한 가문을 편애하지 않는 공명정대한 왕을 칭송하였다.

아침의 회의에, 말레키스가 은빛 자수가 섬세하게 새겨진 도톰한 흑빛의 망토를 이끌며 걸어와, 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서 대신들을 내려다 볼 때 신하들은 복잡한 생각을 잊었다. 자신의 출신을 잊었다. 깊은 그림자로도 가려지지 않는 은빛의 눈동자가 한명, 한명에게 시선을 맞출 때마다 그들은 상기했다. 왕이 저희의 충을 아시나이다. 저희는 왕의 뜻을 이룰 자 이외다. 왕은 늘 첫 어전을 시작하기 전 엷게 미소를 짓곤 하였다. 파르르, 한 무리의 날 짐승이 대궁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서야 왕은 시작하자, 나의 아들들이여 라고 아침 문안의 시작을 알렸다.
- 우리의 왕 저희의 아버지 이 별의 지배자시여.
신하들은 외치고 외쳤다. 완벽하게 지배당하는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까맣게 채웠다.
왕은 자신에게 도취된 아랫것들의 아양을 심드렁하게 바라보았지만 말리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여, 한동안 이어지는 만세 삼창을 구경하였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지도 수천년이라, 고독 속에서 받는 칭송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왕은 깍지를 끼고 만 백성을 내려보았다. 이 세계에서 그보다 높은 자는 없었다. 



그 스바르트 알프하임에는 한 가지 큰 기우가 생겼다. 바로 왕이 최근에 맞이한 아스가르드 출신 왕비가 무척이나 교만하여, 감히 다크엘프의 수장에게 곁을 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무척이나 대담한 행동이었다. 홀홀 단신으로 당장 적으로 돌아설수 있는 땅으로 와서, 자신의 편 하나 없는 이 궁정에서 그 오만한 태도라니. 장로들은 자존심이 상해 속을 끓고 있었고, 시녀들은 단 한번 손이라도 잡으면 여한이 없을 왕을 무시하는 로키에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단 로키는 자신의 공간으로 주어진 방과 정원 이외의 장소를 잘 돌아보지 않았다. 다크엘프의 땅 따위 볼 필요도 없다는 듯한 그 태도에 궁정에선 끊임없이 불만이 터져나왔다. 우리 왕비님은 왕도 사랑하지 않고 나라엔 관심도 없으시다나봐. 계시던 곳을 잊지 못하는 게겠지. 아무리 현재 스바르트 알프하임이 아스가르드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는 하나, 역사로 따지자면 엄연히 아스가르드보다 몇 천년은 앞선 긍지있는 땅이었다. 게다가 아스가르드 쪽에서 알프하임과의 평화를 위해 먼저 제의했던 결혼 이기에, 다크엘프의 장로들은 뒤에서 왕비에 대한 불평 불만을 쏟아내었다.

그보다 더 알수 없는 것은 말레키스의 태도였다. 말레키스는 냉랭한 로키에게 이상할 정도로 너그러웠다. 제멋대로 구는 로키의 행동을 모두 감싸안을 뿐만 아니라, 로키가 요구하는 모든 소원을 들어주었다. 아스가르드가 두려워 제 2 왕위계승자 였던 로키를 보살핀다고 하기엔 말레키스의 행동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말레키스가 이성을 잃을 정도로 로키에게 반한 것 같진 않았다. 말레키스의 행동은 담백했다. 왕은 대체 무슨 생각이시람. 대신들은 머리를 싸맸다. 
- 애초에 외부의 존재를 왕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빛의 자녀라니 선례도 없지 않는가.
- 사실 왕비 저하는 엄밀하게는 어둠의 태생이 맞다. 그는 서리거인의 태로 태어나 오딘의 날개 안에 거둬졌을 뿐이다. 그 하얀 살결 밑에는 우리와 닮은 피가 흐르리라.
- 그러나 그 오만한 자태를 보라. 태초에 빛보다 선행하였던 것이 어둠이다. 그의 외관은 저 건방진 태양의 자손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 대체 왕비는 어느 정도로 우리의 왕을 무시하는가.
- 믿을 수 없지만.
대신 중 하나가 은밀히 목소리를 낮췄다.
- 왕비가 왕과 밤을 보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하더이다.
혼인했던 날 둘이 첫날밤에 같은 방을 쓴 것은 맞지만, 침소를 정리했던 시녀에 의하면 그날 왕과 왕비가 동침한 흔적이 전혀 없고 했다.
자손을 낳아 다크엘프의 번영에 일조하긴 커녕 왕과 내외하는 왕비라니. 결국 대신들의 인내심이 끊어졌다. 

- 왕에게 말씀을 올립시다. 더는 이 모욕을 참을 수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아스가르드 인을 우리들의 어머니로 올린 것은, 그가 여인의 몸이 아니어도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두말할 수 없는 태초 어둠의 피를 이은 증거 때문입니다. 이제 왕비는 자신의 의무를 다 해야합니다.
- 왕은 어디에 계십니까?
- 왕비저하에게 가셨다고 합니다.
- 오늘도 그 교활한 왕비는 이 과일을 가져다 달라, 저 물건을 구해달라 하고 있는 거군요.
지체할 수 없었다. 대신들은 일제히 왕비의 뜰로 향했다. 다행히 왕이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쉽게 왕의 발길을 잡을 수 있었다.
- 왕에게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 무엇인가.
- 저희 장로 일동은 그저 이 세계의 번영과 왕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 말이 거창하군. 고하고 싶은 바가 무엇이기에 서두가 이리 긴 것이냐.
- 삼가하오나, 저희는 왕비님의...
- 잠깐.
말레키스가 손을 들었다. 
- 나의 비가 오고 있다.



왕의 눈길이 닿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무슨 바람인지 정원 이외로 잘 외출도 하지 않던 다크엘프의 왕비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로들은 당황했다. 다크엘프는 기본적으로 위계질서가 강한 나라다. 아무리 왕비가 이세계의 사람이긴 하나, 그들의 뼛속 깊이 새겨진 관념으론 감히 왕비의 앞에서 직언을 할 수는 없었다.
일단 왕에게 말을 올리는 것은 미뤄야 할 일이었다. 왕비의 시야에 그들이 든 이상 왕비의 허락 없이는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신하들은 침묵한채 왕비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솔직히 아름다웠다. 그의 피부는 다크엘프의 그것과 비슷하게 하얀 편이었으나, 은은한 홍조가 맴돌았다. 다크엘프에겐 낯선 혈색이 추하기 보다는 묘하게 사랑스러웠다. 왕비의 눈썹은 섬세하게 다듬어져있고, 콧대는 높았으며 남체임이 분명함에도 얼굴 선이 고왔다. 행동은 괘씸하였으나 과연 최고 왕족의 피가 흐르는 자.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음이 빠른데도 느렸다. 나풀거리는 옷깃 뒤로 하얀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로키는 눈을 내리깔고 걷다가, 문득 왕의 무리를 발견했다. 로키는 웃을 듯 말듯 입술을 그러올렸다. 그리고 잠시 발길을 멈춰, 왕이 서있는 곳을 향해 목례를 했다. 숙인 이마에 섬세하게 새겨진 장신구가 로키의 움직임에 따라 찰랑였다. 그 잔상의 주변으로 옅게 빛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대신들은 실례인 것도 잊고 아직도 얼굴이 낯선 이 세계의 왕비에게 넋을 놓았다. 왕비가 서 있는 곳만 공기가 달랐다.

왕 또한 절도 있게 비에게 목례로 답을 했다. 로키는 인사를 받는둥 마는 둥 시선만 홀낏 준채, 그대로 왕을 지나쳐 다른 방향으로 걸어나갔다. 여전히 예의없는 태도였지만, 눈으로 직접 목도하니 이상하게 감히 그 행위를 비난할 수 없었다.
무척이나 긴듯한 짧은 시간이었다. 말레키스는 왕비의 일행이 완전히 사라지자, 자신의 충신들을 내려보았다.
- 말하고 싶던 바가 있었느냐.
- 아닙, 아닙니다. 
충신들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흩어졌다. 왕비가 사라진 곳에, 은은한 향이 남았다. 













로키는 이 나라의 미용법이 마음에 들었다. 욕조에 정인의 피를 섞어 몸을 담근다. 무척이나 자극적이구나.
기본적으로 물에 약한 편이라 목욕은 즐기지 않지만, 왕의 피로 몸을 적시는 왕비라니. 아홉 세계를 뒤져도 이런 풍습은 발견하기 쉽지 않으리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비밀스러운 통로로 로키의 방에 다다른 말레키스는 전라의 왕비를 감상했다.
처음 만난 날, 로키는 말레키스가 다크엘프 임을 알고 서리거인의 모습을 하려 했지만 아스가르드 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망설였다. 이를 눈치챈 말레키스는 로키가 원하는 모습으로 지내도록 배려했다.

"제 평판이 엉망이던데요."
"정정하길 원하나."
"절대."

로키는 몸을 휙, 돌려 욕조 안으로 몸을 숨겼다. 말레키스는 낮게 웃으며 사랑스런 비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지 마세요. 옷이 젖습니다."
"어차피 벗을 건데 무슨 상관인가."
"말리는 것도 큰 일입니다."
"그대의 곁에 머물 테니 새벽이면 마를테지."

거참. 로키는 말레키스에게 눈을 홀겼다. 이미 말레키스는 대충 겉옷을 던져놓은 채 욕조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로키는 한숨을 쉬면서도 몸을 웅크려 말레키스가 자신을 감싸안게 했다.

"세상에 어떤 왕이 이렇게 떼를 쓴답니까."
"이제 그대의 관심이 아이에게 갈테니 떼를 쓸만도 하지."

말레키스는 로키의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직 납작한 배는 어떤 태도 나지 않았다. 로키는 우울하게 말레키스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형이 눈치채면 알프하임은 멸망합니다."
"그대가 나와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무슨 상관인가."
"부부의 연을 맺고 부모가 되었다면 상관없겠지만, 전 순서가 반대이지 않습니까."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설마 남자인 그대가 임신이 가능한 몸인줄 내가 알았겠는가. 그대도 몰랐는데."
"한번 더 여쭤보겠습니다만, 정말 서리거인은 성별이 구별이 없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
"...."

대답하지 않고 말레키스는 드러난 로키의 어깨에 몇번이고 입을 맞췄다.
말레키스는 다른 화제로 로키의 관심을 돌렸다.

"아이는 언제 공표할건가?"
"임신 초기는 지나야죠. 위험한 시기를 넘긴다면 뭐 더 숨기지도 못하고 숨길 이유도 없을테니 공표하게 되긴 하겠지만."

로키는 그때 자신의 뒷담화를 하던 장로들이 얼마나 놀라 까무러칠지 기대하며 후후후, 사악하게 미소지었다.
말레키스는 때로는 기가 막힐 정도로 우아하면서 때로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장난기 많은 자신의 비를 보았다. 정말이지 이 아이는 팔각정같이 다채로웠다.

"무리하지 말아라. 네 몸이 우선이다."
"흠, 당신은 제가 좋아서 어쩔줄 모르겠죠? 그러니 순진한 절 꼬드겨 냉큼 임신시키고 낚아챘지."
"그대가 순진한지는 모르겠으나,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다."

로키는 말레키스와 눈을 마주쳤다.

"너의 강함보다는 약함에 눈을 사로잡히고. 너의 완벽함보다는 너의 결점에 이끌렸으며. 너의 아름다움 보다는 너의 추함에 반했지."
"취향 한번."
"그런 네가 있을 장소를 주고 싶었다."

로키는 그만 고개를 숙였다. 분명 수도는 잠궈져 있는데, 조용한 욕실에 뚝, 뚝 하고 뜨거운 물방울이 내리앉았다.











엄청엄청 우아한걸 쓰자고 목표했는데 결과는... 음... 그래도 말레키스와 로키의 케미가 좋아서 만족했습니다.

Posted by Karin(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