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9. 03:39

에릭 렌셔의 집은 가난했다. 학교를 계속 다닌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자, 소년은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주변의 어른들 대부분처럼 막노동을 했지만 며칠만에 다리를 다쳐서 나온 병원비가 그동안 번 돈보다 많았다. 앉아 있을 수 있는 직업이래서 공장에 취직했지만 텃세가 심한 작업반장에게 잘못 보여 잘렸다. 상심한 소년에게 아는 사람이 한번 자신의 친척에게 일을 배워보겠냐고 권유했다. 소년은 그 분이 무슨 일을 하시냐고 물었다. 시장에서 일한다고 들었어. 어쨌건 돈을 벌려면 장사를 배워야 하잖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소개받은 사람은 생선가게 사장님 이었다. 소년이 잘 부탁드린다고 고개를 조아리자 사장님은 그래, 잘해봐. 힘들꺼야 라고 말하며 어깨를 탕탕 두드려 주었다. 

소년은 수하물을 옮기는 등의 잡일만 했으나, 곧 사장의 명령으로 잔기술인 회를 뜨는 법을 배웠다. 경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소년에게 조금이나마 잔기술을 익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이 시장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 에릭같은 소년들은 평생 허드렛일만 하며 몇 년씩 일을 해도 월급이 제자리인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소년은 자신의 운에 감사했다. 시장의 사람들은 대부분 사는 정도가 비슷비슷했다. 어차피 진짜 부자들은 시장에서 직접 물건을 사지 않을테니, 이 시장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이란 기껏해야 중산층일게 뻔했다. 소년은 그들과 미래의 자신은 거의 비슷한 위치일거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열심히 일해서 언젠가 자신도 다른 손님들처럼 남의 가게에서 이것 저것 잘난척 하며 물건을 고르고 좀 깎아달라고 떼도 쓰리라 마음먹었다. 그럼 자신도 남들과 같은 위치가 되는 거겠지. 소년은 시간이 가는게 너무나 즐거웠다.

일을 알려준 선배는 무뚝뚝하지만 저녁엔 술도 가끔 사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엔가 선배는 점장님에게 소년이 생각보다 손재주가 있어서 실전에 빨리 투입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소년은 자신이 완전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좋냐?"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처음엔 비닐부터 벗기구, 머리꼬리 자를 때 손님이 못 보도록 등으로 잘 가리고.. 아 또 뭐라고 했지 내가?"
"신중하게 한답시고 천천히 하지 말고 빨리 하라고.. 그래야 능숙해 보인다고."
"그렇지. 그리고 손 베지 말고. 니가 손 다치는 게 문제가 아니고 생선에 피라도 묻었다간 물건값 통째로 월급에서 빠지거든."
에릭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하다가 한 번 제대로 베인 적이 있었는데 그 날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그나저나 겨울에 일하게 되서 좋진 않네."
"왜요? 여름에 시작하면 비린내 나고 생선이 상하니까 겨울이 좋지 않나요?"
하이고, 생각짧은 놈. 선배는 혀를 끌끌 찼다.

연습과 실전이 다르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에릭은 가게가 오픈하고 세 시간 째 쉴틈없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

사장의 가게는 손님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겨울에 왜 이리 회를 많이 먹는거야, 시발, 작작 좀 처먹지. 에릭은 마음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손님에게 헤실헤실 웃었다. 손님들의 얼굴도 제대로 못보겠다. 그냥 붉고 부들부들한 것들을 일정하지도 않은 두께로 대충 썰어서 넘겨주었다. 시장에서 뜨는 회는 횟집이나 일식집에서 처럼 일정하게 뜰 필요는 없다. 그저 먹을만하게, 적당히, 하지만 더러워 보이지 않게 끄름만 잘라주면 되는 거였다. 워낙 저렴한 가계였기에 사람들은 군말없이 삐뚤빼뚤한 에릭의 작품을 받아갔다.

"다 되었습니다."
"저 두마리 떠달라고 했는데요."
"네?"
"에릭, 이 멍청아!"
뒤에서 한창 도미 가운데를 발라내던 선배가 곧바로 튀어나왔다. 선배는 할말이 없어진 에릭을 대신에 허리를 굽씬거리며 손님에게 사과했다.
"아휴, 죄송합니다, 헤헤.. 한 접시에 따로 해드릴게요."
"아 좀 물어보고 해주지 거참.. 아니 사온 고기를 따로따로 싸주는 법이 어딨어."
"어휴 그렇죠 그렇죠, 괜찮으면 다시 두 접시에 두 마리 다 올려드릴게요."
"거참 빨리 가야하는데.."
"금방 됩니다, 좀만 기달려 주세요."
에릭은 눈치껏 손님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손님의 요구대로 조심스레 두 접시에 두 마리의 생선을 올렸다. 짜증이 나서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시발 처음 잘못 담는거 봤을 말하던가!

겨울이라 방어, 숭어가 잘 나갔다. 광어도 빠지지 않고, 우럭을 추가해 달라는 사람도 있고, 대부분 매운탕 거리도 같이 주문했고, 와사비 빼달라는 여자도 있었고. 양념장도 쏠쏠하게 매출에 도움이 되었다. 척 봐도 아가미가 검붉은데 그걸 사와서 떠달라는 손님도 있었다. 보는 눈도 없는 호구새끼. 이런걸 왜 회로 먹어? 널린 게 날생선인데. 갓 죽은거랑 오래 지난 것도 몰라? 하지만 쓸데없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그럴 여유도 없었다. 
이젠 손에 감각이 없다. 손이 얼어 제대로 모아지지도 않았다.
에릭의 손은 붉다 못해 푸르딩딩했다. 동상에 걸리면 어쩌지? 하지만 쉴 수가 없다. 손님들이 자신의 도마 앞에서 길게 줄을 섰기에 선배가 알려준 요령대로 난로에 손을 가져다 댈 짬도 내지 못했다. 

시계를 보니 퇴근시간 한시간 전이었다. 뭣 때문인지 무려 6키로어치 횟감에 매운탕용 생선까지 따로 주문이 들어왔다. 크리스마스 전날이니 친척 모임이라도 하는걸까. 에릭은 탈진한 머리로 우리 친척은 코빼기도 안비친지 몇년이 되가더라 생각하며 선배가 다듬어놓은 생선 조각을 받았다. 너무 힘들었다. 칼을 쥔 에릭의 오른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손님을 기다리게 할 수 없었기에 에릭은 왼손으로 칼등을 눌러가며 비틀비틀 횟감을 자르고 있었다.

"안 추우세요?"
조용하지만 또렷하게 잘 들리는 목소리었다. 에릭은 순간 소란스럽던 시장이 일순간에 조용해 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푸른 빛이었다. 손님은 에릭 자신과 비슷한 나이인것 같았다. 하지만 손님의 얼굴은 훨씬 고운 편이었고, 체구는 자그마했다. 입고 있는 옷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색깔이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검은색 머리인가? 약간 갈색인것 같기도 하고.. 웨이브진 머리가 남자인데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크리스마스인데, 고생하시네요."
"아, 아뇨... 제 일이니까.."
그 손님은, 마치 많은 일을 맡겨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님들이 에릭의 월급을 만들어준다. 그 사실은 에릭도 손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고마웠다.
에릭은 가슴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에릭은 우물쭈물 손님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손님 중에 제일 많이 사신 것 같아요."
"네."
이번엔 손님이 쑥쓰럽게 웃었다. 에릭이 봤었던 어떤 여자보다도 이 손님이 더 예쁜 것 같았다. 
에릭은 최대한 집중해서 최대한 일정한 간격으로, 가장 예쁜 모양으로 회를 떴다. 손님은 두 손으로 정중하게 비닐 봉지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손님은 고개를 숙이며 에릭에게 인사했다. 에릭은 놀라서 자신도 허리를 푹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 감사합니다."
"크리스마스 잘 보내세요."
"네, 네..." 
에릭은 손님이 떠나자, 얼어붙었던 자신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찰스 자비에가 어렸을 적,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세뇌하다 시피 반복한 말이 있었다. 
어머니는 엄한 분이셨기에, 그녀가 강조해서 그 말을 반복할 때마다 찰스는 조용히 자신의 발 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은,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뉜단다.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이지."
어머니는 허리를 꼿꼿히 세우고, 그러니 너는 네가 받은 혜택에 감사해야 한단다, 라고 선언했다. 찰스는 어머니의 것이었다.

찰스의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이었다가, 다시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과거형인 이유는 대지주의 딸이었던 어머니가 찰스를 낳자 마자 아버지와 이혼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의 이름만 꺼내도 치를 떨게 분명했기에 찰스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시장출신이라는 것, 다정한 사람었지만 돈이 많은 찰스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나서 사람이 변해버렸다는 것 정도가 찰스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였다.
찰스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가끔 서민들이 이용하는 시장에 가보곤 했다. 무서워서 감히 아버지를 찾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 곳 사람들의 피가 일부 자신에게 흐르는 것인지, 낯설고 지저분한 시장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정감이 갔다.

찰스는 과일 가게도 돌아보고, 선물 가게에서 필요없는 물건을 사기도 했다. 꽃을 파는 소녀에게 선의를 배푼 적도 있었고, 괜히 중고 책 가게에서 할일없이 서적을 뒤적이기도 했다.
정육점의 비위생적인 풍경에 놀라기도 하고, 시장 물건 치고 꽤 훌륭한 장식장을 보며 이걸 산다면, 어떻게 몰래 옮길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다, 찰스는 짧은 비명소리를 들었다. 소리가 난 쪽으로 가자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소년이 생선을 나르다 발을 헛디뎠는지 맨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생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가게에서 뚱뚱한 아저씨가 나타나 소년의 뺨을 쳤다. 찰스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에릭, 머리는 어디다 둔거야!! 이런것도 제대로 못하냐!"
"죄송합니다."
"멍청이! 잘리고 싶냐!!"
소년은 이 추운 겨울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소년은 맨 손으로 흩어진 얼음과 생선을 줍기 시작했다. 찰스는 그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옷은 물에 적셔져 있었고, 얼굴은 지저분 했으며 소년의 손은 왜인지 상처 투성이였다. 찰스는 자신이 울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의 아버지가 이 곳에서 찰스를 낳아 키웠다면 저 소년의 운명이 찰스 자신의 운명이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소년이 어느 정도 생선을 수습하고 가게로 사라졌다. 찰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 가게로 갔다. 가게 앞엔 소년이 생선을 줍는 동안 전혀 도와 주지 않았던 덩치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찰스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여기, 사장님이 누구신가요?"
"사장님은 안에 계십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손님?"
"됐네, 로건! 들어가게나!"
중년의 사장은 돈을 많이 벌었기에, 비싼 물건에 관해 눈썰미가 있는 편이었다. 
찰스의 옷은 이 시장 사람들이 평생 월급을 모아서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고급품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도련님?"
"저, 방금전 소년 말입니다만, 혹시 오늘 일로 해고 되는 것은 아니겠죠?"
"해고요? 아, 일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는 사람에게 부탁받은 녀석이라서 맡아두고는 있습니다. 오늘 일로 해고를 한다는 건 좀 너무하지만, 이런 실수가 잦은 녀석이니 좀 나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기, 그 소년에게 잘 해주시면 안될까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무언가 기술을 배우게 한다거나."
찰스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도련님. 도련님의 말씀이 아주 어려운 부탁은 아닙니다.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 그렇다면 저도 도련님에게 부탁을 드려야 한답니다."
"어떤 일인가요?"
"저희 집에서 한달에 한번, 거래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도련님의 용돈으로 충분하겠지요. 어려우시다면 하인을 시키셔도 됩니다. 금액은 상관 없습니다."
"아."
찰스는 머리가 좋았다. 찰스는 이 가게의 사장이 어떻게 이렇게 까지 큰 점포를 소유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장은 이그재비어 가라는 인맥을 확보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분명 찰스의 용돈 정도로도, 이 거래는 성립할 수 있었다.
"꼭 생선이 아니어도 됩니다. 이 시장의 1/5은 저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뇨. 생선으로 할게요. 대금을 치룰 테니, 제 개인 명의로 적당한 곳에 기부할까 합니다. 저희 가문의 이름은 쓸 수 없습니다만.."
"충분합니다. 도련님은 현명하신 분이시군요."
찰스는 어머니가 후원하려다 깜빡 잊었던 고아원으로 적당한 양의 물품을 매입해 보내기로 했다. 
그럼, 하고 돌아서는 찰스에게, 사장이 한마디 더 붙였다.
"에릭 렌셔라고 합니다."
"사장님의 성함이요?"
"아뇨, 그 생선을 엎었던 소년 말입니다."
"아. 아뇨, 전 그가..."
찰스는 뒷말을 잊지 못하고 시장을 빠져나와 달렸다. 그러고보니, 찰스는 소년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람. 하지만 가게로 돌아가서 사장에게 거래를 취소하자고 말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날이었다.

로건은 의아한 얼굴로 도련님이 사라진 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사장은 싱글 벙글 웃으며 로건과 같은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 그 도련님은 뭔가요?"
"...로건. 지금 당장 에릭 렌셔에게 기술을 가르쳐. 그리고 최대한 빨리 손님을 접하게 해."
"잡일만 시키게 할 것 아니셨습니까?"
"아니."
사장의 눈빛이 빛났다. 승부를 잡았을 때의 표정이었다.
"저 녀석은 유통까지 키워야 해."

 

에릭 렌셔가 모르는 새 그에게 찰스 자비에의 영향은 엄청나게 미치고 있었다.
일단 선배는 에릭에게 많은 것들, 이를 테면 좋은 것과 좋지 않지만 빠른 것, 돈이 되는 것들을 일러주었다.
에릭이 일하는 곳은 수시로 바뀌어서 어떨 때는 물류 쪽에, 어떤 때는 경매 쪽에, 어떤 때는 재고파악 쪽으로 불려가 에릭은 정신없이 일을 배웠다.

찰스는 에릭이 일하는 가게에 제법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하지만 에릭이 자신을 알게 되어도 할 말이 없었기에 찰스는 에릭이 일하는 곳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 
가게가 워낙 넓었기에, 사장실로 곧바로 올라가버리면 전혀 마주칠 수 없었다. 사장은 찰스를 가장 중요한 손님에 준해 대접했다. 찰스의 성씨를 듣고 그의 집안을 확인하고 난 후 사장은 더더욱 찰스에게 친절했다.
"사장님. 아무리 그래도 저에게 너무 신경을 써주시는거 아닌가요. 제가 많은 금액을 거래하는 것도 아니고."
"하하하... 도련님. 도련님의 용돈은, 에릭 렌셔의 월급 보다 많답니다."
"네?"
"에릭 렌셔 말입니다. 도련님이 호의로 봐주고 있는 그 녀석이요."
"에릭 렌셔라고 하는군요."
"한 번 도련님이 오셨을 때 만나신적 있으시다고 하던데, 에릭과 같이 있던 직원에게 물어보니 에릭은 도련님을 모르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아, 네."
"아무리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직접적으로 그에게 월급을 주거나 후원하는 건 아니니 괜찮습니다. 말하지 말아주세요."
"음, 확실히 직접적으로 도련님이 그에게 도움을 주느 것은 아니지만, 사실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사장은 현명하게 말을 줄였다. 굳이 여기서 도련님은 에릭랜셔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신원을 보증하고, 일자리에서 유리한 위치에 오를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는 말을 꺼낼 필요가 없었다.

찰스도 사장의 의중을 눈치채고 화제를 전환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요?"
"나이는 아마 도련님과 비슷할 겁니다. 집안이 어려워 의무교육을 간신히 졸업했다고 들었습니다. 머리는 나쁜 편이 아닙니다만. 조금 조용한 성격이긴 하지만 대체적으론 성실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요?"
"그에게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직접 만나 물어보시는게 어떻겠습니까?"
"네?"
"퇴근은 보통 7시입니다. 마침 지금 시간이 거의 다 됬군요."
사장은 마음 속으로 미소지었다. 이 도련님이 자신이 주어온 말단 직원에게 푹 빠져 있다니, 자신의 성공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연히, 찰스는 사장의 요구를 수락했다. 그날 찰스가 주문한 생선은 지금까지 주문한 양 중 최고로 많았다.

오늘도 힘든 하루였다.
에릭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일 전에 역할이 바뀌어서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에릭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장은, 자신을 훈련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배워야지. 에릭의 눈이 빛났다.
퇴근하려 가게 문을 나서자, 에릭은 익숙한 사람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 자신을 보고 마치 아는 사람인것 처럼 환하게 웃는 소년. 단 한번 만났지만, 알수 있었다.
"크리스마스 때 손님이시군요."
"네, 맞아요. 그 날은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찰스는 방긋, 웃었다. 에릭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쪽으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지금 퇴근하시는 것 같은데, 식사 하셨나요?"
"아, 아뇨."
"괜찮으시다면, 저랑 식사하러 가셔도 괜찮으실까요?"
"네!!"
에릭은 곧바로 대답했다. 여자친구가 있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 만남은 마치 데이트 같았다.

둘은 순식간에 친해졌다. 서로 이름을 알고 나서, 식사를 마치자 마자 둘은 말을 놓았다. 찰스는 뻔질나게 에릭이 일하는 곳으로 찾아왔다. 에릭은 찰스를 만날 때면 전날 부터 목욕을 하고, 수돗가에서 미친듯이 손을 씻고 양치를 했다. 머리카락을 물에 적신 후 다시 머리를 세팅하고, 입술이 튼 부분엔 같이 일하는 누나를 졸라 연고를 발랐다. 

찰스는 화제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동갑이라고 했는데, 잘사는 집 아들이라서 그런지 정말 똑똑했다. 에릭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 둘의 '데이트' 비용 부담은, 다행히도 1:1에 가까웠다. 어째서인지 에릭이 유통쪽으로 배치되면서 성과급이 나왔기 때문이다. 에릭의 월급은 처음 가게에 취직했을 때 보다 두 배 이상 올랐다. 에릭은 찰스가 좋아하는 과자와, 찰스의 눈 색깔을 연상시키는 머플러를 선물할 수 있어서 기뻤다. 찰스는 고민하는 얼굴이었지만, 비싼 물건이 아님을 연거푸 확인하고 나서야 선물을 받았다. 
"난 에릭, 네가 나에게 선물을 하는 것보다 네가 번 돈은 너를 위해 썼으면 좋겠어."
"나를 위해 썼어. 찰스 너에게 선물하는게 지금 상태에선 가장 내가 원하는거야."
찰스는 살짝 웃었다. 에릭은 넋을 읽고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찰스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좋은 품질의 옷에,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에, 상냥한 표정을 하고 있다. 에릭은 찰스를 볼 때마다 현실감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은 확실하다. 에릭은 사랑을 한 적은 없었지만, 찰스가 자신의 첫사랑이란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다.

"찰스. 너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 있어."
"뭔데?"
"난 너를 볼 때마다, 네가 남자인걸 잊어버려."
"남자 맞는데."
찰스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에릭은 찰스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에릭은 조심스럽게 찰스의 볼에 손을 대었다. 
찰스의 미소가 멈췄다.
"감히 너에게 키스해도 될까."
"에릭..."
"네가 너무 귀한 사람이라 무서워. 그러니까 내 말은, 너는 나와는 다른 세상의..."
"에릭."
찰스는 자신의 볼에 올려진 에릭의 손을 꽉 잡았다.
"제발 나에게 키스해줘, 에릭."

에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릭의 입술이 찰스의 입술에 닿았다가, 벌어져 그 달콤한 선물을 혀로 풀어헤쳤다. 찰스는 눈을 감고 에릭의 키스를 받으며, 자신의 얼굴을 감싼 에릭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성탄제 날, 처음으로 손님으로서 에릭을 만날 날. 너무나도 차가워 보였던 에릭의 언 손을 붙잡아 녹여주고 싶었다. 찰스의 소원이 지금에야 이루어 졌다. 

Posted by Karin(카린)
2014. 3. 9.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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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9.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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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9. 03:35

죠나단이 8살때 아버지는 그를 데려왔다.  똑똑히 기억한다. 금발에 아름다운 눈동자, 하얀 피부.

자택의 사람들은 무언가 불길한 느낌의 사내라며 수근거렸지만 죠나단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디오가 자신을 바라보며 나즉히 인사했을때, 이 어린 소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 외의 타인을 원했다.

죠나단이 10세가 되던 생일날, 아버지는 죠나단에게 생일 선물을 물어봤다.

 

 "그것을 주세요."

 "안된단다. 디오는 아버지의 것이란다. " 

 

아버지는 나즉히 거절했다.

 

"그럼 낮에는 아버지가 쓰시고 밤에는 제가 빌릴께요. 그것도 안될까요?"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가 없어서 디오가 이불을 뎁혀놓지 않으면 잘 수가 없단다."

"그럼 반의 반나절은요?"

 "아버지는 일을 할때 너무나 많은 것이 필요하지. 디오가 없으면 아버지는 아무것도 할수 없을거야."

 "좋아요. 그럼 하루에 세시간은요?"

"네가 알다시피, 아버지는 끔찍하게 정리를 하지 못하지. 디오가 없다면 아버지는 이 저택을 쓰레기의 산으로 만들지도 모른단다."

 

절망적이었다. 죠나단은 좀더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하루에 한시간."

"안돼."

"삼일에 한번."

"너무 잦아."

 

제발..! 죠나단은 아버지의 양손을 꼭 붙잡았다.

 

"일주일에 한번이요. 아버지."

 

아버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죠나단은 한번 더 간절히 호소했다.

 

"일주일에 단 한번, 한시간만이요. 더는 바라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영 켕기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디오쪽을 바라보고 엄숙하게 말했다.

 

"일주일에 한번, 한시간. 넌 죠나단의 것이다. "

"알겠습니다."

 

디오는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디오가 자신의 방에 오게된 날, 죠나단은 하인을 시켜 모든 방을 청소시켰다.
디오는 방긋 웃으며 자신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 보았다. 

"당신으로선 드물게 끈질기게 조르더군요. 저의 한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건가요?"
"내 소유권을 확인할꺼야."

디오는 예쁘게 웃었다. 죠나단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의 저에 대한 소유권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죠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떤 것입니까?"
"내 엄마 역할을 해줘."

죠나단은 옷장을 뒤져, 자신이 아버지의 옷장에서 숨겨 놓았던 실크 잠옷을 꺼냈다.
자신의 기억에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은은한 색깔의  얇은 원피스 잠옷이었다.
디오는 싫어하는 기색 없이 그것을 받아들여, 죠나단의 눈 앞에서 옷을 벗고 바로 그것을 갈아입었다.
아, 그것은 디오의 몸에 정말로 잘 어울렸다.

그날 이후 죠나단은 디오를 끌어안고 잤다. 화장실을 갔다가 이불에 파고든다는게 그만 치맛속으로 파고든 적도 있었다. 
처음에 그 실크 잠옷엔 어머니의 냄새가 났는데 점차 디오의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아빠가 유치해요! 으하하 

제목이 이상한 이유는 리퀘 내용이 곧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맙소사

Posted by Karin(카린)
2014. 3. 9. 03:32

연서복이란 연애에 서툰 남자의 줄임말입니다 흐흐



1.

로키는 친형인 토르의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였다. 자신은 미술 전공이었기에 체대생인 형과 같은 대학을 갈 생각이 강하진 않았지만, 자신을 지도하던 선생이 자신의 화풍을 가장 잘 발전시킬 수 있는 말레키스 교수를 찾아가라며 강력하게 추천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미대가 생긴지 얼마 안되서 설마 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과제의 양과 전혀 다른 발상을 요구하는 과제는 로키의 승부욕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 이번 과제까지는. 그 말레키스 교수의 이번 과제는 [인물의 품성을 반영한 인물화를 그릴 것] 이었다. 사물을 그리는 것보다 인물을 그리는 것에 컴플렉스가 있는 로키에게, 이번 과제는 가장 스트레스가 큰 작업이었다. 

"형. 날 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뭔데?"
"형 학과에 몸좋은 사람 많아?"
"나."
"...아니, 형이 몸이 좋다는 건 형의 여친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어. 이번엔 다른 모델이 필요해."
"좋았어, 어떤 모델을 찾는거지?"
"일단.. 성격이 좋은 사람이면 좋아. 예의가 있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우아한 매너가 있으면 더 바랄게 없지. 좀 바보같을 정도로 착한 사람도 괜찮지만 자기 주장과 고집은 있어야해. 술담배는 되도록 안했으면 좋겠고. 게임이나 도박 중독은 안되. 색을 밝히는 사람과 나는 맞지 않아. 아, 욕설을 하는 사람도 NG야. 애인이 없는 편이 시간을 자주 낼수 있으니 좋겠지. 하지만 섹시한 매력이 없는 모델은 그릴 가치가 없어. 그래서 키와 몸매가 모델급이면 더 좋겠어. 난 미학적으로 추한 건 자주 보고 싶지 않거든.그런데 프로는 안되. 너무 상업적인 느낌이 나는 몸은 내 취향이 아니야.  금방 구할 수 있겠지?"

결혼 상대 찾는 것보다 까다로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토르는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올해 복학한 자신의 동기 스티브였다.

스티브는 토르와 학부는 같지만 학과가 다른 체육대생이었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란데다 남자들이 더글거리는 환경에서 자랐기에 여자를 다루는 법이 서툴다는 것 빼고는 제법 괜찮은 친구였다.
2학년 1학기가 끝나기 직전, 뉴스에서 불공평하게 배분되고 있는 의료자원에 대한 문제에 분개해
 과감히 1년 반학기를 휴학했다. 각종 단체에서 무임금으로 일하고, 시위에도 참가했지만 성과가 없었다고 들었다.
자퇴서를 내고 그 단체에 뼈를 묻을까 고민 했다고 들었지만 주변 사람들이 미친듯이 말린 덕에 다행히 원래 다니던 2학년으로 복학하게 되었다.

스티브는 절친한 친구인 토르가 동생을 소개시켜 주겠다며 불러낸 술자리에서, 사랑에 빠졌다. - 맙소사. 그곳에 여신이 앉아있었다. (여자가 아니었지만.)  

그 수줍은 미소와, 진지한 눈빛. 첫 만남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자신에게 로키는 "자신이 꿈꾸던 모델로서의 이상형 그 자체"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정중하게, 괜찮다면 자신의 모델이 되어주겠냐고 말했던 것이다.  

 

 

2.

스티브는 로키와 처음 만난 그날 무려 2년만에 처음으로 스케치북을 꺼내 미친듯이 로키를 그렸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토르의 SNS에 로키와 찍은 가족사진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략 20장 쯤 넘게 그렸을 때 스티브는 자신이 어쩌면 로키에게 반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스티브는 고민에 빠졌다. 자신이 게이였을까 고민했지만, 동성애를 차별하는건 좋지 않기에 로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티브는 자신이 아는 최고의 연애박사에게 SOS를 청했다. - 공대생 토니 스타크 였다.

토니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했다.
상대에 대해 잘 알아볼 것. - 스티브는 다음날 로키의 학과생 전원의 명단을 구해 1:1로 로키에 대해 물어보았다.
자주 연락할 것. - 스티브는 로키에게 하루 5번씩 전화를 걸었다.
유머감각은 필수! - 스티브는 자신이 알거나 들은 모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매 통화마다 들려주었다.
선물을 사줄 때 돈을 아끼지 말 것 - 스티브는 우연히 알게 된 로키의 생일에 핑크색 장미 백송이가 꽃힌 꽃다발과 화분을 보냈다. 


3.
로키는 이 잘생긴 스토커 때문에 정신 쇠약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일단, 스티브는 문자를 거의 하지 않고 모든 연락을 전화로 했다.
아침엔 "잘잤어요?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지각하지 말아요." 점심엔 "로키 씨, 밥 먹었어요? 밥 사줄까요?" 오후엔 "지금 수업 다 끝났죠? 집까지 데려다 드릴께요." 저녁엔 "오늘 정말 고생했어요. 푹 주무세요."

같은 일이 3일째 반복되자 로키는 폭발했다. 이제 전화하지 마세요, 라고 하니 
하루 5통의 전화가 10번의 메세지로 바뀌었다. 엄청난 오타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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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일어낫어요? 오전 9:30

[여기까지 읽으셨습니다]

Steve 조은 날씨네요 ㅎ 오전 11:20 1

Steve 밥 먹엇어요? 형이 사줄까요? 오후 12:30 1

Steve 학교 끗낫어요? ㅎㅎ 오후 4:2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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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ve 로키씨 연락이 안되네요 ㅠㅠ 오후 9:3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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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는 마지막 메세지에 가슴이 뜨끔했다. 어쨌건 자신의 과제 때문에 모델을 하기로 한 사람에게 완전히 쌀쌀맞게 굴기도 힘들다. 

로키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답변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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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 죄송해요 바빠서 ^^; 오후 11:21

Steve 닿ㅐㅇ이다>< 오후 11:22 

Steve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요? ㅎㅎ 오후 11:24

Steve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니? 백설공주니? 아니요, 로키님이요 ㅎ 오후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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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는 핸드폰 베터리를 분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4.

사실 스티브가 스토커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일단 그 스토커는 로키가 하지 말라는 일은 하지 않는다. 선물을 보내지 말랬더니 그뒤로 스티브는 자신에게 식사를 사주는 것 이외에는 자신에게 더 이상 무언갈 사주지 않았다. 전화를 하지 말랬더니 문자로 바뀌었고, 연락이 너무 잦다고 화를 내니 하루에 딱 두번으로 바뀌었다. 첫날을 제외하곤 자신의 뒤를 쫓는다거나 개인정보를 수집한다거나 몰래 사진을 모으는 짓도 하지 않는다.
(사실 토르가 SNS에 올린 사진은 모두 스티브의 핸드폰 사진 갤러리에 저장되었지만 로키가 그것을 알리 만무했다.)  

게다가 스티브의 얼굴과 몸은, 예술가 로서 정말 탐나는 소재였다. 로키는 본격적으로 과제에 들어가기 앞서 스티브에게 조심스레 노출을 부탁했다.
"과제의 내용이 인물의 내면을 반영시키는 것인데, 당신의 얼굴 뿐 아니라 몸도 보고싶어요. 상반신 뿐이긴 하지만, 괜찮을까요? 작업실은 두시간 동안 제가 빌렸으니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에요."
스티브는 조금 얼굴을 붉혔지만, 애초에 노출이 있을수 있다는건 처음 모델을 제의받았을 때 부터 알고 있었다. 스티브는 순순히 입고 왔던 붉은 체크무늬 셔츠를 벗었다. 로키는 스티브의 상체를 보고 숨을 멈췄다. 맙소사. 입고 온 옷이 너무 끔찍해서 였는지 좋은지 알고 있었던 몸이 눈대중으로 본 것보다도 훨씬 완벽했다.  이 과제를 낸 말레키스는 천재임에 틀림 없다. 로키는 정말 인물화가 자신의 컴플렉스가 맞았는지 잊을 정도로 미친듯이 과제에 집중했다.

데셍 후, 상당히 지쳤는지 스티브는 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움직이지 않느라 힘드셨죠?"
"아, 네, 지난번에도 생각했지만, 모델이라는 거 정말 힘든 거네요....."
" 정말 고마워요."
"도움이 됬다니 기뻐요."
 
하하, 하고 환하게 웃는 미소가 눈부시다. 다음엔 사진을 찍어야겠다. 이렇게 해맑게 웃을수 있는 20대 남자가 몇명이나 있을까?
스티브는 들이대는 방식은 최악이지만 사실 사람도 괜찮고,  겉모습은 완벽한 자신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 로키는 이 남자라면 사귀어도 나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가슴근육을 키우길 잘했어요."

...그말 취소다.

"네?"
"오늘 괜찮았어요? 조금 오기전에, 우람한 편이 좋을까 고민해서 급하게 펌핑시켰거든요"
"저기, 굳이 주무르면서 말 하지마실래요?" 

로키는 재빨리 스티브를 쫓아냈다.


과제가 완성된 날, 로키는 처음으로 스티브에게 식사를 샀다. 원래대로라면 매번 식사를 자신이 사는게 맞았는데, 어째서인지 여자를 꼬시는것처럼 자신을 대하던 스티브 때문에 자신이 차마 식사를 내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보통 둘이 볼때면 식당은 늘 스티브가 고르곤 했는데, 로키는 대체 이렇게 옷을 못입는 남자가 어째서 이렇게 데이트 하기에 최상의 식당을 알고 있는지 의문스러웠다.  
스티브는 미친듯이 먹고 있었다. 밥을 사주는 상대에게 잔소리를 해도 되나 고민했지만 로키는 조용히 말했다.
"천천히 드세요."
말을 듣자 스티브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한참을 식사하지 않기에 이유를 물어봤더니 "천천히 먹으래서" 라고 대답했다.
정말이지. 로키는 어쨌건 즐거운 식사시간을 위해 대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뭐하고 지내요?"
"운동."
더 할말이 없었다. 침묵 후 갑자기 스티브가 뜬금없는 것을 물어왔다. 
"로키씨는 연애 안해요?"
"하고 싶긴 한데, 상대가 없네요."
"그럼 혹시.."

로키는 스티브가 말하고 싶은 것을 눈치채고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전 모델이랑은 사귀지 않아요."
"왜요?!!"
"..."
"모, 모델이랑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사귀어 본적 있어요?"
"아뇨."
바로 스티브는 시무룩하게 풀이 죽었다. 어휴 정말. 로키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로키는 스티브에게 호감이 있었다. - 더 말할 것도 없이 스티브는 남녀 정체성조차 넘어선 자신의 이상형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마음에 든다. 문제는 정말 지나치게 들이댄다는 것. 
연애에 서툰 정도가 아니라 엉망 진창이다. 그렇지만,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아름다운 남자다. 접해본 바로 그의 영혼은 더 아름다웠다.  
로키는 주저하다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당신은 완벽하진 않지만, 매력적이에요. 사귈까 고민한 적도 있고.. 지금도 탐나는 건 사실이에요."
한참을 침묵하다가, 스티브는 할말이 있어, 라며 손에 깍지를 끼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로키는 ... 이 타이밍은, 고백일까. 하고 포크를 내려놓고 스티브에게 집중했다.
"저 사실 고아에요."
...이게 무슨?
"부모님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학자금 대출로 대학을 다녀야 했기 때문에 지금은 가난해요. 앞으로 좋은 직장을 가지는게 좋겠지만 사실 사회활동쪽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그쪽은 아마 수입이 불안정 할것 같아요. 그리고 전 소심하고 낯을 가려서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에요. 고집도 세고.. 그리고 연애경험도 별로 없어서 둔하다고 자주 차이는 편이에요." 
"네.."
"전 거짓말을 싫어하거든요."

로키는 멍하니 스티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거짓말은 나쁘지만, 사귀지도 않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솔직한거 아냐?  패닉에 빠진 로키의 손을 잡고, 스티븐 별이 반짝이는 듯한 얼굴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로키씨, 저랑 사귀어 주실래요?  
"아뇨."

그날 이후 로키는 두 번 다시 스티브에게 만나자고 하지 않았다. 

학기가 끝났다. 로키는 인터넷으로 가장 궁금했던 말레키스 교수의 강의점수를 확인했다. -  A+ 등급. 이번 학기의 최고 시련이었던 과제 점수에서 거의 완벽한 찬사를 받았던 것이 역시 컸다.
게다가, 말레키스 교수는 로키에게 친히 이번 작품은 최고였다, 혹시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에 소개해도 괜찮느냐는 메일을 보냈다. 로키는 당연하죠! 라는 요지의 답변 메일을 보냈다. 간만에 메일함에 들어왔더니 스팸과 광고 메일이 산더미였다. 로키는 메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익숙한 이름의 남자가 보낸 메일이 보였다. 발신인은 자신의 스토커씨. 내용만 보고 바로 지우려 했는데 첨부파일이 보였다. 

"아. 내가 보내달라고 했었던 그림.."

처음 스티브가 모델을 섰을때, 스티브는 쑥스럽게 웃으며 자신도 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보고싶으니 보내달라고 했는데, 자신이 너무 늦게 확인한 것이다.
첨부파일을 열자 체대생의 실력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데생 수준이 높았기에 로키는 깜짝 놀랐다. 모두 연필화였는데, 주제는 다양했다. 겨울나무. 산새. 달리는 늑대. 포옹하는 연인. 시계탑. 구름. 하늘. 벽돌. 빗물. 
한장 한장 서툴지만 성실하게 그려냈다. 착한 남자라서 그런 걸까, 그림도 맑고 투명한 것 같았다. 대부분은 풍경화나 소묘가 많았지만, 뒷부분은 인물화였다.

"...."

모델은 전부 자기 자신이었다.




토니는 최근 살이 빠진 스티브를 데리고 각종 클럽을 순회중이었다. 한달 전 바보같은 체리보이가 이때까지 자신의 충고를 어떻게 응용했는지 듣고 기함을 했다. 하지만 이미 그 사슴같은 남자와 이 체리보이의 플래그는 희망이 없었다.
"스티브! 잘 들어. 저 아가씨들에게 한잔씩 보내는거야. 도수가 높으면 안되고, 달콤한 종류가 좋아. 아, 작업은 내가 할테니, 절대 넌 말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걸 배워."
"아니..난..."
"쉿. 간다."

 토니는 익숙하게 바텐더에게 귓속말을 건냈다. 스티브는 현란한 조명과 음악소리 때문에, 자신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Posted by Karin(카린)
2014. 3. 9. 03:30

1.
웅성거리는 소란에 의식이 부상한다. 션은 이불을 뒤집어 썼지만, 오늘이 바로 자신의 생일임을 깨달았다. 분명, 교수님은 대단한 선물을 준비해준다고 했다.
션은 벌떡 일어나, 씻지도 않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이미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늦잠을 잔 것에 굴하지 않고 션은 씩씩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좋은 아침!!"
"..."
"..."
"..."
"...좋은 아침 이구나. 션."
"분위기가 왜이렇게 구려요?"
션은 인상을 찌부렸다. 하지만 아침 상차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차려진 요리에,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
"오늘 이게 다 뭐래요? 제 생일을 축하하려고 성이라도 팔고 파티하기로 한거에요, 찰스?"
말없이 고기를 뜯던 알렉스가 물었다.
"너, 생일이었어?"
"무슨 소리야! 그럼 오늘이 내 생일이지 누구 생일인데! 뭐야, 그럼 이 산더미 같은 식사는 뭔데!!"
"음, 음, 일단, 생일 축하한다, 션."
"..교수님도 모르셨던 거에요?"
너무해, 션은 우울했지만, 어쨌건 식탁에 넘쳐흐르는 미식은 기쁘다. 투덜거리면서도 션은 자리를 잡고 앉아, 게걸스럽게 음식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거의 바닥을 긁게 될 때쯤에서야 션은 닭고기를 채 씹지도 않은 채로 교수에게 물었다.
"근데, 이게 진짜 다 뭐래요?" 
어쩐지 아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2.
행크는 최근, 교수님이 좀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소포가 날아온다. 어마어마하게 날아온다.
물론 찰스는 교수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많은 우편물을 받곤 한다. 그런데 발신국이 심하게 다양하다. 미국, 중국, 일본, 유럽, 때론 말도 안되는 변방의 국가에서 까지 날아오는 것이다.
연구와 관련된 샘플이라고 찰스가 둘러댔지만, 행크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날아온 숄이 찰스의 유전학 연구와 연관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고 생각했다. 
원래도 찰스가 걸치고 있는 것들은 제법 가격이 대단했지만, 지금의 찰스는 레벨을 10단계 정도 더 높인것 같았다. 일단, 남자가 할 수 있는 악세사리 류는 거의 전 종류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본적 없는 물건에 찰스의 취향과 통일성도 없었다. 
펜, 시계, 넥타이, 커프스핀. 차고에 차가 5대가 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수다쟁이 션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교수님."
"왜, 행크?"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것을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어떤 건데?"
"교수님 설마 쇼핑 중독이세요?"
"...오해야. 다 선물 받은 거야."
교수는 쓴 웃음을 지었다. 별일 아니라며 교수가 자리를 뜨는 순간, 행크는 신음했다. 맙소사. 휠체어 마저 신상이라니. 



3.
알렉스는 새벽마다 자비에 성을 돈다. 행크가 만들고 있는 새 슈트는, 기능만큼이나 무게도 향상되었다.
행크가 경량화에 성공할 거라며 호언장담했지만, 일단 자신의 체력과 근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어떤 것보다도 좋은 대처법이다. 알렉스는 달리기를 시작했다.
만만치 않은 마라톤이지만 심심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장미.
해바라기. 바람꽃. 백합.
금잔화. 베고니아. 메리골드. 나팔꽃, 복수초.
코스모스? 계절을 넘어서도 정도가 있지.  저건...아카시아? 아예 꽃 나무를 통채로 옮겨 심었구나.

최근 자비에 성에는, 무수한 꽃다발과 화분이 매일 배달되고 있었다. 

 

 

4.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찰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자신의 금전감각도 보통은 아니라는 평을 받고 있지만, 이 선물 공세는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 이다. 
어떤 영화가 재미있겠다고 말했더니 극장 한관이 일주일동안 통째로 비워졌다.
여행이나 떠날까 했는데 비행기표에 숙소표, 식당까지 예약된 포트폴리오가 14개 날아들어왔다.
다리 치료가 더디다고 의사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다음날 다른 병원의 의사가 비행기를 타고 자비에 성으로 날아와 진료를 봐줬다.
불안하다. 어디 있는지 메세지라도 남길 수 있다면 이제 이런 것좀 그만 하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교수님...!!"
"왜, 이번엔 또 뭔데."
"교수님, 오늘자 신문 광고 보셨어요?!!!! 모든 광고가 [친애하는 찰스에게] 달랑 한문장이에요!!!"
- 신이시여! 
찰스는 그만 울고 싶어 졌다.


5.
그 시각 매그니토는 브라더 후드의 다음 일정에 관해 보고를 받던 중이었다. 정확하고, 위험부담 낮고, 효과는 확실한 것. 고개짓으로 작전을 허가한다.
어둠속에 사라지는 인원들을 확인 하자마자 매그니토는 재빨리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아자젤과 엠마도 따라 나섰다.
"나도 데려가."
"미스틱."
"어머, 보는 눈 없는 꼬마 숙녀는 집이나 지키는게 어떨런지?"
엠마의 장난스런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고, 미스틱은 어깨를 으쓱, 했다.
"이 중 선물받는 사람 취향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매그니토는 한숨을 쉬며, 미스틱에게 손짓했다."...따라와." - 유황연기와 함께 넷은 사라졌다.


6.
오늘 노리는 것은, 부피대비 최대의 가치를 자랑하는 탄소 덩어리 였다. 저거 진짜야? 다이아 몬드가 저렇게 커질 수가 있어? 촌스럽긴. 넌 내 몸을 보고도 구별도 못하냐.여자들이 캣파이트를 하며 싸우는 동안 매그니토는 거진 주먹만한 광물을 노려봤다. 저것이다. 저게 바로 최상이다.
"아자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낙찰받어."
저걸 왜 사는데! 미스틱은 매그니토의 패기어린 발언에 바로 반박했다.
"필요없어 저런 것!! 찰스는 저런 보석은 별로 안좋아한다니까!!"
"좀 가만히 있을래? 니 돈 쓰겠다는 것도 아니고 너 준다는 것도 아닌데 왜이렇게 시끄러우실까."
엠마또한 화려한 돌의 마력에 심하게 흥분한 것 같았다.
"우리 오빠 거지 아니라고!!"
"아니니까 저런 걸 줘야하지 않겠나."
에릭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미스틱은 자신이 대체 자비에 성의 방이 몇개인지 아직도 파악할수 없었다. (아마 찰스도 모를 거다.) 부자를 넘어서 대 부호가 어울리는 찰스에게, 엔간한 규모의 선물로는 전혀 부담이 될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도 장담컨데 불쌍한 자신의 오빠는 이미 허용량을 넘은 상태일게 분명했다.
"대체 너무 심하잖아! 음식에 꽃에 여행에 영화에.. 돈이 아까워!! 아니 그럴거면 차라리 땅을 사줘!!"
"네 말에 반박하지. 첫째, 난 찰스에게 쓰는 돈이 아깝지 않아. 둘째, 이미 사줬어."
"아, 그래... 가 아니라, 대체 
무슨 남자친구끼리 선물질이야 당신 우리 오빠랑 있었을 때 무슨 돈때문에 자존심 죽은 적 있었어?! 복수야? 복수냐고!"
포인트를 잘못 짚는군. 과연, 연애경험 없는 아가씨구나. 아자젤은 세 사람의 대화에 끼지 않고 묵묵히 낙찰금액을 적어 올리고 있었다.
"네-!! 더 없으신지!!....37번, 37번!!! 1억, 더 없으십니까?"
"1억 2천."
장내는 순간 쥐죽은 듯 조용해 졌다. 
에릭은 자신만만하게 한마디를 더 붙였다.

"모두 현찰로."
 



7.
매그니토는 후후후, 하며 기쁨을 숨기지 못했다. 아자젤은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만 매그니토가 웃는게 정말 나쁜 놈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외의 것들은 준비됬나."
"네. 호텔,연주자,인테리어,불꽃놀이,와인까지 완벽하게 세팅되었습니다."
매그니토는 다시 한번 최고급 벨벳으로 싸여진 케이스를 열어보았다. 글귀를 확인하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엠마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엑스맨쪽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무엇인가!!"
"To Sharks, 2일후 이곳으로.라는 메세지를 모든 언론에 제보한 것으로 보입니다."
역시. 매그니토는 낮게 탄식했다. 과연 찰스 자비에. 대담한 도발이 만족스럽다.
"그런데, 상어라니 무슨 말이죠?"
"글쎄."
메그니토는 시치미를 뗐다. 바로 매그니토는 아자젤에게 단호히 명령했다.
"결전의 날을 앞당긴다. 일단 옮길 수 있는 건 모두 자비에 성으로."
"...네."
그날 아자젤은 거의 밤을 새서 호텔의 세팅된 인테리어를 자비에 성으로 옮겼다.  



8.
신문을 본 찰스가 폭발해서 세간의 모든 광고를 사들인 다 다음날,  
엑스맨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어제만 해도 정원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식탁과 휘황찬란한 장식들과 왜인지 부산스럽게 튜닝을 하고 있는 연주자들은 뭐란 말인가? 자신들의 감시를 피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뮤턴트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아자젤인가."
비스트가 으르렁 거렸다. 그때였다. 온다, 붉은 연기가 작은 파열음과 함께 퍼져나갔다.
찰스를 포함한 엑스맨들은 태세를 갖췄다.비장한 엑스맨의 앞에 소동의 중심, 매그니토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릭."
몇 개월만의 만남에 찰스는 탄식하듯 그를 불렀다.
"
보낸 것들은 마음에 들었나." 
적들은 사상 최강의 테러리스트. 경계를 풀지 않으며 찰스는 조용히 대답했다.
"멋진 선물, 고마워. 호의에 감사하지만..이제 됬어. 더 이상 그런 것들은 보내지 않아도 되."
옆에서 행크도 거들었다.
"맞아요, 교수님도 부족한 거 없이 사시는 분이에요! 그런 선물들로 환심을 사려 하지 말아요!!" 
매그니토는 그저 눈썹을 실룩일 뿐이었다. 매그니토는 입을 열었다.
"이해가 안되는군. 그만 두라니. 내가 하는 일 중에 그나마 이것이 가장 찰스 너의 취향과 부합했을 텐데."
그건 사실이었다. 에릭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단 자신에게 선물을 떠넘기는 것이 나았다.
"고마웠지만, 지나쳐. 기쁘지 않아."
"네가 기쁘라고 한게 아니니까."
자기 만족임을 숨기지 않으며 매그니토는 웃었다. 어쨌건 찰스는 재미없는 꼬맹이들에 싸여 있다. 매그니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가 나에게 오라고 한 이유는 자네의 말을 들어주길 원해서인가."
"맞아."
"내가 네 말을 들을 필요는 없지." 
적진 한가운데 임에도 매그니토는 성큼 성큼 찰스에게 걸어갔다. 으르렁 거리며 알렉스가 그 앞을 막아섰지만, 교수가 부드럽게 제지했다. 
매그니토가 손으로 딱, 하는 소리를 내자, 연주자들은 유유히 세레나데를 연주하기 시각했다. 그리고 매그니토는 몸을 낮춰, 찰스와 눈을 맞췄다.
찰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여러번 깜빡였다. 이상했다. 그저 눈높이가 달라졌을 뿐인데 지금의 매그니토는, 예전의 에릭처럼 보였다.
 
"예상과 달라졌지만, 어쨌건 네것이다."
찰스는 자신도 모르게 에릭이 내민 상자를 받아들였다.
"가자."
매그니토는 수천달러의 호텔 인테리어와, 임금을 뒤로 한채 그대로 사라졌다.



9.
그날 밤 자비에 성 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전원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인원은 제법 모였는데, 아무도 말을 열지 않았다.
존경받는 교수가 동성에게 압사당하기 직전까지 구애받는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입밖으로 내놓는단 말인가. 
흠, 흠, 모여주신 여러분 감사드려요.. 웅얼거리면서 행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응?"
"그...역시 에릭과"
"무엇을 상상하는지 알것 같은데, 아냐."
"...아, 의외네요. 전 이 상황에서 당연히."
크흠, 하고 센스있게 알렉스가 기침했다. 찰스는 고마워서 눈물이 날것 같았다. 이 순간 만큼은 알렉스가 자신의 히어로였다.
"어쨌건 지금 상황이, 어, 음..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네 말에 동의해."
울컥해서 자신도 광고를 산 것이 부자연스럽게 보였을게 틀림 없다. 지금 상황은, 정부측에서 본다면 에릭과 찰스가 내통한다는 의심을 사기에도 충분했다.
또한 학생들의 풍기도 어지럽혀 지고 있다. 교수님랑 매그니토가 사실은 수근수근으로 이어지는 스캔들이 여학생들 사이에서 대 유행을 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떤 작전을 세워야 하나? 세운다고 해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뱅글뱅글 도돌이표 같은 대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새벽 한시가 되서야 소득없이 회의는 끝났다. 
션은 약혼예물 받으신거 축하해요, 라고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10.
하루가 길다.
찰스는 하루를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대체 에릭은 어째서 이러는 걸까.
문득 넘겨받은 예물이 떠올랐다. 
찰스는 화려한 벨벳의 상자를 열었다. 말도 안되는 사이즈의 다이아몬드 위에 섬세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 [마음을, 너에게.]

"차라리 고백을 해.."

찰스는 한숨을 쉬며 차가운 보석에 입을 맞췄다. -END-










교수님 그거 고백 맞..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Posted by Karin(카린)
2014. 3. 9.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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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9. 02:57

에릭 렌셔는 매우 매니악한 취향의 소설가였다. 에릭이 묘사하는 캐릭터들은 독창적이었고, 에릭은 심리묘사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데뷔를 하지 못했다. 에릭은 남이 생각해볼 법한 설정이나 스토리를 강박적으로 싫어했다. 분명 창작을 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재능이지만, 유행할만한 요소를 전혀 차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중작가로 팔리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의에 빠진 에릭은 존경하던 선배 작가가 출판사 사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릭은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선배를 찾아갔다. 평소 에릭을 눈여겨 보고 있던 선배 작가는 에릭의 원고를 보자마자 에릭의 장점과 단점이 그 옛날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릭의 재능은 아까웠다. 선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에릭에게 절충선을 제시했다. 선배는 에릭에게 에릭의 데뷔를 돕고 싶지만, 현재 자신의 출판사가 자리를 잡지 못한 만큼, 일단 팔릴만한 물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선배가 제시한 것은 에릭의 심리묘사를 활용한 연애소설이었다.


연애소설이라니. 싸구려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에릭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 기회라도 준 출판사는 이곳이 유일했다. 에릭은 울며 겨자먹기로 연애 소설을 쓰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물은 형편 없었다. 에릭 렌셔는 헌신적이고 제법 괜찮은 연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대체 왜 사람들이 사랑노래에 미치고, 사랑영화를 보고, 가상의 사랑이야기에 집착하는 것인지 전혀 알수 없었다. 물론 연애는 좋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에릭은 그와의 육체관계를 더 마음에 들어했다. 에릭의 연애소설은 [한눈에 반했다]가 아니라 [잠자리가 필요해서 만났다] [조금 끌려서 만나긴 했는데 몇년 만나니 시들해졌다]라는 그 자신의 경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에릭의 연인이 된지 아직 채 1년이 되지 않은 찰스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찰스는 부유한 가정에서 듬뿍 사랑을 받고 자랐기에 인간의 선의와 애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사람이었다. 에릭과의 연애 또한 만족하고 있었다. 찰스는 에릭이 프로작가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노력하고 있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 그의 고민은 최근 몇 년보다도 더욱 심각해 보였다.


찰스는 에릭에게 넌지시 최근 에릭이 힘들어하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에릭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에릭이 사랑이야기를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대체 어째서? 에릭은 말수가 적은 편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좋은 연인이었다. 찰스는 에릭과 사귀면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에릭이 한눈도 팔지 않고 신사적인 사람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열정이 부족하려나. 그러나 에릭과의 잠자리가 만족스러웠기에 그 또한 큰 일은 아니었다.


어쨌건 에릭의 데뷔가 중요했기 때문에 찰스는 헌신적으로 에릭을 도와주었다. 헌신적으로 도와준다고 하여도, 에릭의 소설을 읽고 감상을 말해주었다. 찰스는 이 작업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사귈 때도 희미하고 눈치채고 있던 에릭의 인간에 대한 지독한 불신을 알게 되었다.


에릭 렌셔는 가여운 사람이었다.

찰스는 말로만 듣던 아동학대의 대상자를 처음 겪었다. 에릭의 상처는 너무나 컸고, 거진 30년을 걸쳐 세겨진 선입관은 어떤 햇살도 받아들일 틈새를 내어주지 않았다. 벽, 벽이다. 찰스는 울고, 달래고, 속삭이고, 껴안고, 모든 노력을 다 해봤다. 정신과 상담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에릭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하며 찰스를 일정 이상 받아들이지도 자기 자신이 나오지도 않았다.


찰스는 에릭과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외로워져갔다. 찰스는 대체 왜 이렇게 잘난 남자의 주변에 사람이 없었는지 깨달으며 지쳐갔다. 정말로 사랑하는 한 사람 정도는 포용할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찰스의 오만이었다. 찰스는 에릭을 만나는 것에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상처입은 그를 동정하는 걸까? 가끔 에릭이 찰스의 부유하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이유로 더 내칠 때 찰스는 더 절망을 느꼈다. 그러나 에릭은 정말,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에릭은 찰스의 조언에 따라 -에릭 자신이 전혀 믿지 않는- 완벽한 사랑을 묘사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묘사에서 에릭은 자신도 모르게 미친듯이 집필했다.
소설이 완성되어 갈수록 에릭은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 어찌어찌 단편을 완성했다. 이런 사랑을 할수 있는 인간이 어디에 있나. 에릭은 모형정원같이 완벽한 스토리를 보며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 에릭은 충동적으로 맨 뒷편에 먹물로 거짓말! 이라고 휘갈겼다. 에릭은 그것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그날 에릭은 폭음을 하다 급성 알콜중독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에릭이 입원해있는 동안 찰스는 에릭의 부탁으로 에릭의 집에 원고지와 몇 가지 필요한 자료를 가지러 갔다. 입원한 동안에는 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무언가 쓰는 것이 더 안심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는 에릭의 방에서 쓰레기통에 들어있던 소설을 보게되었다. 잠깐 망설였지만, 아마도 에릭을 입원시킨 결정적인 이유가 그 종이뭉치일거란 직감이 들었다.
찰스는 쓰레기통에서 거칠게 내팽겨쳐진 원고더미를 들어올린 후 한장, 한장, 원고지를 넘겼다. 분명히 평범한 사랑이야기이긴 한데 드문드문 떨리는 필체와, 불안하게 흐트러지는 에릭답지 않은 지리멸렬한 문장이 에릭의 발버둥처럼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소설이 사랑스러울스록 섬세한 슬픔이 심장을 파고 들었다 .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마지막 장의 휘갈긴 낙서를 보자 서있을 수가 없어 찰스는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흐르는 눈물이 펑펑 절규가 되었다. 울고 울면서, 찰스는 자신이 두 번 다시는 한 사람을 이렇게까지 사랑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찰스 자기 자신이 그만 텅 비어버렸음을 것을 깨달았다. 

둘은 에릭이 퇴원할 때까지 좀 더 사귀었지만, 초겨울 마지막 달려있던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조용히 헤어졌다.




 

에릭은 찰스와는 담담하게 헤어졌지만, 며칠 지나지도 않아 선배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감정을 터트렸다. 선배는 에릭이 퇴원한 후에야 연락을 받았기에 서둘려 에릭의 전화를 받았다. 이런. 에릭은 이번에도 잔뜩 취해있었다. 에릭은 선배에게 안한다 했잖아요, 그건 쓰레기에요- 부터 시작해서, 내가 쓴 사랑 이야기는 완전히 가식이다, 알지도 못하는 걸 미사여구로 꾸며놓은 사기라고 외쳤다. 자신은 영혼이 기형인 인간이라 제대로 된 사랑을 모르는 인간인데 어쩌란 말이냐며 버럭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릭은 다음날 오후까지 자다가 간신히 일어났는데, 선배가 바로 옆에 앉아있었다. 며칠 전 입원을 한 에릭을 걱정해서 날이 밝자마자 바로 에릭의 집으로 간 것이다. 에릭은 문도 잠그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다. 선배는 에릭에게 그렇게까지 그 소설을 쓰기 싫어하는 것인줄 몰랐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선배는 에릭이 몇번이나 건낸 원고를 떠올렸다. 그것은 출판하기엔 무언가 정말, 이상한 것이었다. 다른 글에서는 무척이나 이지적이고 어른스러운 작가가, 유독 사랑이란 주제 앞에서 불안한 어린아이처럼 변덕스럽고도 비뚠 심성을 내비쳤다. 선배는 조금 망설이다가 에릭에게 넌 믿지도 않는다는 그 사랑을 너무나도 갈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고 말했다.


어쨌건 이번 일로 에릭은 의욕을 잃어 집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괜히 그 단편을 썼나 싶었다. 아니 애초에 재능도 없는데 소설을 쓰는게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은, 찰스와 괜히 헤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마 에릭의 경험으로 보건대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분명 자신의 문제 때문에 둘은 지쳐서 헤어질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에릭은 평소처럼 원나잇만 할껄 괜히 애인같은 걸 만들어서 괴롭다고 생각했다. 찰스가 그리웠지만 에릭은 막판에 찰스를 이용하기만 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에릭은 차마 찰스에게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죄책감과 그리움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

시간이 지나 상처가 회복될 때 쯤, 에릭은 식료품을 사러 거리를 나갔다. 거리에는 일년 전 유행하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에릭은 문득 흘러나오는 가사가 에릭 자신과 찰스의 이야기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에릭은 간만에 책방에 들려 새로 나온 소설들을 살펴보았다. 한 소설에 나온 헤어진 커플이 에릭과 찰스의 상황과 비슷하여 너무 가슴아팠다. 에릭은 며칠 후 좋아하던 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게 되었다.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지만 보답받지 못한 사랑이야기가 나왔는데, 찰스가 생각나서 더 몰입하게 되었다. 에릭은 인간이 만든 그 모든 것에서 찰스를 떠올렸다. 심지어 비문학 책을 봐도 인간관계, 인생에 대한 서술이 모두 자신과 그의 관계가 부서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 만 같았다. 생활에 마주치는 모든 것이 에릭 자신과 그로 치환하여 보였다. 


에릭은 자신이 내던졌던 자신의 마지막 단편을 천천히 읽었다. 그 땐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어색했던 단어들. 뻔한 문장들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완벽한 사랑 이야기가 거기에 있었다.




후일담1.
에릭의 소설은 경이로운 판매고를 올렸다.

후일담2.
몇 개월 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조용해 졌다. 

에릭의 집앞에 한 남자가 망설이며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에릭이 자신에게 붙인 별명과 같은 제목의 책이 들려있었다. 




여담 설정은 에릭의 소설이 경이로운 판매고를 올리게 된 것은 에릭의 소설을 원작으로 다른 매체가 만들어졌는데 그 매체가 크게 성공하고, 그 매체를 접한 사람들이 에릭의 원작 소설을 읽어보았는데 워낙 에릭이 심리묘사를 애절하게 잘 해서 오히려 초판보다 재판 이후가 더 잘 팔리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Karin(카린)